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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6:42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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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운산금광회사 |
한글표제 | 운산금광회사 |
한자표제 | 雲山金鑛會社 |
관련어 | 광산(鑛山), 채굴권(採掘權),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東洋鑛業開發株式會社) |
분야 | 경제/산업/광업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
왕대 |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
집필자 | 조재곤 |
폐지 시기 | 1939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운산금광회사(雲山金鑛會社) |
1895년(고종 32) 미국이 조선 정부로부터 평안도 운산지역의 금광채굴권을 양도받은 뒤 채굴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
개설
미국은 1895년 제국열강 중 처음으로 조선에서 광산이권 획득에 성공한 후 회사를 설립하였고, 1939년 일본에게 넘길 때까지 약 40년 동안 채굴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미국은 조선 금광의 유망성에 주목하여 한미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토대로 세밀한 기술적인 탐사를 거쳐 매장량이 가장 풍부한 운산금광을 개발하기로 하였다. 미국이 운산금광 채굴계약을 정식으로 조선 정부와 체결한 것은 1895년 7월이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이 미국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이미 10년 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은 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이었다.
1887년(고종 24) 앨런은 금광이권을 미국 상사에게 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며 함유량이 가장 많기로 소문나 있는 평안도 운산금광의 독점권을 줄 것을 조선 정부에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가 조선에서 떠나게 됨에 따라 교섭은 일시 중지되었다. 그러던 중 앨런이 1890년(고종 27) 7월부터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1892년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앨런은 조선 정부에게 미국인에게 금광이권을 주라고 다시 권유하였고 그 결과 운산금광을 모스에게 준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계약체결 시 모스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앨런이 대신 계약서를 작성하고 7월 2일 궁내부 대신김한종의 서명을 받아 7월 15일 탁지부 대신이하영과 전 20조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의하면 조선개광회사는 주식회사로 모스와 조선 왕실이 공동 경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모스는 계약체결 후에도 요코하마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됨에 따라 실질적인 교섭은 앨런과 미국무역회사 제물포지점장 타운젠드(William Townsend)가 맡았다. 타운젠드와 동행한 광산기사 에버런트(Everant)는 1개월 체류하면서 기계들을 수선하고 개광 착수에 앞서 실태를 세밀히 파악하였다.
그러나 특허권은 당분간 실행되지 못했고 왕후 시해 등 돌발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함에 따라 일단 정지되었다. 그러던 중 1896년 4월 14일 앨런 등의 요청에 따라 4월 17일 궁내부 대신이재순이 금광 약정 기일의 재인가를 조인하였고, 5월 서명된 계약안은 외무대신이완용에게 공식으로 수교되었다. 그 내용은 1895년 7월의 계약안에 단지 기간 만 1896년부터 25년으로 개정하고 앞으로 6개월 이내에 광산개발에 착수한다는 조건이었다.
조직 및 역할
1896년 4월 모스는 정식으로 운산금광 채굴권을 얻고, 5월 10여 명의 인원을 운산에 파견하여 채광업무를 개시하였다. 8월 31일에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매주당 액면가 50달러에 해당하는 1998주를 모집하여 자본금 10만 달러로 조선개광회사(Korean Mining and Development Co.)를 설립하여 인가를 얻었다. 그런데 자본이 부족했던 모스는 이 이권을 헨리 콜브랜(Henry Collbran)에게 양도할 생각이 있었다. 이를 간파한 헌트(Leigh S. J. Hunt)는 1897년 요코하마로 모스를 찾아가 적당한 가격으로 운산금광 채굴권을 양도할 것을 제안하였고, 모스가 이를 받아들여 3만 달러에 넘겼다고 한다. 이권을 양도받은 헌트와 파세트(J. Sloat Fasset)은 1897년 9월 29일 영국자본까지 수용하여 버지니아에서 총 자본금 500만 달러를 모아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를 조직하여 웨스트 버지니아 주 정부의 인가를 얻었다. 이들이 조선개광회사를 완전히 인수한 것은 1898년 5월 18일이었다. 이 회사는 뉴욕에 본사를 두고 제물포와 운산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헌트는 한국왕실과 공동소유가 아닌 미국인 단독으로 경영하려 하였고, 결국 1899년 3월 27일 궁내부 광무감독이용익과 금광회사 대변인 파세트가 수정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이후부터는 운산금광은 동양광업개발회사 단독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이후 동양광업개발회사는 1900년 1월 1일부터 매년 2,500원을 상납한다는 조약의 이행으로 우선 조선 왕실에 정식으로 5,000원을 지불하였다.
변천
운산금광은 ‘노다지’라는 유행어가 돌 만큼 동양 최대의 수익성 높은 금광이었다. 1903년 5월 처음 이익 배분이 있었으며, 회사의 활동은 1938년까지 42년간 지속되었다. 미국인들은 1939년 일본인에게 넘겨줄 때까지 약 10개 소의 대갱(大坑)과 소갱(小坑)에서 채굴을 하였고, 총 900만 톤의 금을 채굴하여 총 1,5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얻었다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윤성순, 『조선광업지』, 대한중석광업회사, 1952.
- 이배용, 「구한말 미국의 운산금광 채굴권 획득에 대하여」, 『역사학보』50·5, 1971.
- 평안북도지, 『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