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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1:20 기준 최신판



창덕궁의 대조전 권역인 내전에 속한 중층 누각.

개설

태종이 1405년(태종 5) 창덕궁을 완성할 때 내전에 3칸 규모의 동루를 함께 조성하였다. 이 동루는 1461년(세조 7) 궁궐 내의 각 실들에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 그저 ‘내루(內樓)’로 칭했다. 이 내루가 경훈각 2층의 징광루를 이르는 것이라 추측된다(『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창건 초기에는 각각 응복정(凝福亭), 옥화당(玉華堂)이라 불린 동·서 별실을 갖추고 광세전(光世殿)이라 불리던 누하(樓下)를 가진 누각을 ‘경훈각’으로 이름을 바꾼 듯하다(『태종실록』 5년 10월 19일)(『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초기에는 주로 왕실 대군과 신료들이 함께 모여 내전 잔치를 베풀던 곳이었으나 조선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내전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여름에 피서하고 한가로이 쉬는 장소로 쓰였다. 숙종의 「영경훈각시(詠景薰閣詩)」에는, 징광루 아래서 더위를 피하니 부채질도 필요 없고 편안히 좋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며 경훈각을 노래하고 있다.

위치 및 용도

「동궐도(東闕圖)」상에서 보면 경훈각은 창덕궁의 내전인 대조전(大造殿) 후원 마당에 놓여 있었다. 후원 마당에는 두 전각이 있었는데 동쪽은 현종이 모후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위해 지은 집인 집상전(集祥殿)이 있었고, 서쪽에는 조선초기에 창건되어 중건과 보수를 거듭한 징광루, 경훈각 중층 건물이 있었다. 이 누각의 서쪽으로 영휘당, 옥화당, 익각이 연이어 놓여 있고, 영휘당에는 숙종의 어진을 봉안해 두기도 하였다. 창건 초기에는 경훈각의 동쪽으로도 익각이 이어져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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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경훈각과 징광루로 이루어진 이 누각은 태종 시기인 창덕궁 창건 초에 건설되었다. 인조반정 시 창덕궁 내전의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647년(인조 25), 인경궁(仁慶宮) 전각을 이건하여 복구하였고 다시 순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음 해 중건하였다. 순종 시기의 「동궐도형(東闕圖形)」과 순조 때의 「동궐도」에서 배치 형태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833년(순조 33) 순조 때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옛 제도를 따라 복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내전의 대화재로 다시 소실되었다. 이때 경복궁의 건물을 이건하여 대조전 등의 내전을 복구하였으나 경훈각은 중층 누각이 아닌 단층 건물로 중건되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관련사건 및 일화

효종이 승하하기 한 달 전인 1659년(효종 10) 4월, 세자가 학질에 걸려 침과 약을 써도 효력이 없었다.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 수 있다는 민간에서 하는 말에 세자를 경훈각 마당에 세우고 2층 징광루에 올라가 질기와를 내던져 깨뜨렸다. 온 궁궐이 요동하고 시끄럽게 떠들었는데 보는 사람들이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 하며 민망해 하였고 다음 달에 효종이 승하하였다.

1917년 불이 나기 전 징광루의 동·서 양 벽 기둥에는 고종의 어필이 있었다. 동쪽 기둥에는 금으로 ‘동망금오(東望金烏)’, 서쪽 기둥에는 ‘서섬옥토(西贍玉兎)’라는 글자를 조각한 주련을 걸어 두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 서우학회, 「京城歷史의 槪要(續)」, 『서우(西友)』제13호,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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