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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5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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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궁찬 |
한글표제 | 남궁찬 |
한자표제 | 南宮璨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연산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여헌(汝獻)[족보]⋅숙헌(叔獻)[방목] |
호 | 창랑(滄浪)⋅호은(壺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사망 | 1504년(연산군 10) |
본관 | 함열(咸悅) |
주거지 | 서울[京] |
묘소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
증조부 | 남궁좌(南宮佐); 군수(郡守) |
조부 | 남궁치(南宮致); 군수(郡守) |
부 | 남궁순(南宮順); 생원(生員) |
모_외조 | 최씨(崔氏); 감찰 최돈(崔敦)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 김씨(金氏); 김익겸(金益謙)의 딸 (둘째부인) 신씨(申氏); 신자승(申自繩)의 딸 |
자녀 | (1자) 남궁필(南宮弼); 현감(縣監) (2자) 남궁익(南宮翼); 임피현령(臨陂縣令) (1자) 남궁숙(南宮淑); 문과 급제,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궁찬(南宮璨) |
총론
[생년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중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강원도 감사(監司)⋅제주목사(濟州牧使)이다. 자(字)는 여헌(汝獻)이고, 호(號)는 창랑(滄浪)⋅호은(壺隱)이다. 본관은 함열(咸悅)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남궁순(南宮順)이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사헌부 감찰(監察)최돈(崔敦)의 딸이다. 함경도 감사(監司)남궁숙(南宮淑)의 아버지이고, 사섬시 정(正)남궁희(南宮憘)와 호조 참판(參判)남궁침(南宮忱)의 조부이다.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장원(壯元)하고, 중시(重試)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3장(場)의 장원 급제로 유명하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禍)를 당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7년(성종 8)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1등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다시 생원과(生員科)에 또 1등 장원으로 합격하여, ‘천재(天才)’라고 소문이 났다.[<사마방목>]
1489년(성종 20)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바로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는데, 기사관(記事官)으로서 사초(史草)에 기록된 내용을 도승지한건(韓健)에게 말하였다가,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죄로 추국(推鞫)당하였다.
1493년(성종 24) 이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1497년(연산군 3) 문신(文臣) 정시(庭試)에 수석을 차지하였고,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미움을 사서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502년(연산군 8) 남궁찬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되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제주목사는 바다를 건너가서 부임하다가, 풍랑이 심하여 바다에 빠져죽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이 제주목사에 부임하는 것을 꺼려하였다.
1504년(성종 10)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때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폐출하는 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당할 때 감사남궁찬도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전라도 익산 용안(龍安)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갔다.
성품과 일화
성품은 청렴결백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1506년(중종 1) 11월에 중종이 전교(傳敎)하기를, “<갑자사화> 때에 죄도 없이 귀양을 가서 죽은 중추부 동지사(同知事)표연말(表沿沫), 참판조위(曹偉)⋅권주(權柱), 관찰사남궁찬(南宮璨), 참판이창신(李昌臣) 등은 혹은 적소(謫所)에 빈소를 차린 자도 있고, 혹은 고향에 장사를 지낸 자도 있으니,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라.” 하였다.[『중종실록』 1년 11월 11일 5번째기사] 이 기사에 의하면 남궁찬은 고향 전라도 용안(龍安)에 유배되었다가, 1505년(연산군 11) 2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기 전에 고향 전라도 익산 용안의 고향집에서 돌아간 것이 틀림없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에 있는데, 무덤 앞의 좌우 석상(石像)은 특이하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첫째부인 김씨(金氏)는 김익겸(金益謙)의 딸인데, 1남을 낳았고, 둘째부인 신씨(申氏)는 신자승(申自繩)의 딸인데, 2남을 낳았다. 장남 남궁필(南宮弼)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 남궁익(南宮翼)은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삼남 남궁숙(南宮淑)은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손자 남궁희(南宮憘: 남궁익의 아들)는 문과에 급제하여, 첨정(僉正)을 지냈고, 손자 남궁침(南宮忱: 남궁익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參判)을 지냈고, 손자 남궁제(南宮悌: 남궁숙의 아들)는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지냈다. 둘째부인 신씨(申氏)의 무덤은 자기가 낳은 차남 남궁익(南宮翼)와 삼남 남궁숙(南宮淑)과 함께 서울 도봉구 도봉동 산 86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남궁익의 아들인 남궁희(南宮憘)⋅남궁침(南宮枕), 남궁희의 아들 남궁제(南宮悌)의 무덤도 함께 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미암집(眉巖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천집(淵泉集)』
- 『지산문집(志山文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