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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51 기준 최신판




총론

[1672년(현종 13)∼1730년(영조 6) = 59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예조 정랑(正郞), 평해군수(平海郡守)이다. 자(字)는 사앙(士昻)이다. 초명은 만추(萬秋)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제주도 서귀포 남원읍 의귀리 출신으로, 후에 제주도 정의현으로 이주하였는데, 만년에는 경상북도 순흥(順興)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고원(高瑗)이다. 제주도로 유배 온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인 만구와(晩求窩) 김진구(金鎭龜)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김진구의 아들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도 제주도로 유배 오게 되자 그를 찾아가 공부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708년(숙종 34) 식년(式年) 문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7세였다.[<문과방목>] 성균관 가주서(假注書)로 보임되었으며, 전적(典籍), 직강(直講),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영조 시대 활동

1725년(영조 1) 사헌부 감찰(監察) 겸 춘추관(兼春秋館)이 되었고, 형조 좌랑(佐郞), 예조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1726년(영조 2)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가, 강원도평해군수(平海郡守)에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갔다.

1730년(영조 6) 서울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제주도로 반장(返葬)하였다.

그는 촉문(囑文)이라 불릴 정도로 글을 잘 지었으며, 숙종 또한 그의 글 솜씨를 칭찬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귀포(西歸浦) 서흥리에 있는데, 만구와(晩求窩) 김진구의 아들인 김복택(金福澤)이 지은 비문이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인제(李仁濟)의 딸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씨세록』
  • 『북헌집(北軒集)』
  • 『서재집(西齋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증보 탐라지』
  • 『탐라성주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