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세주(南世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8년 1월 8일 (월) 15: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남세주 |
한글표제 | 남세주 |
한자표제 | 南世周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연산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인보(仁父) |
호 | 송파(松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45년(세종 27) |
사망 | 1504년(연산군 10) |
본관 | 고성(固城) |
주거지 | 경기 양주(楊州) |
증조부 | 남기(南奇); 부윤(府尹) |
조부 | 남금(南琴); 문과 급제, 병조 참의(參議), 강원도 감사(監司) |
부 | 남익문(南益文); 진사(進士) |
형제 | (형) 남세담(南世聃): 문과 급제, 사간원 헌납(獻納) (동생) 남세진(南世晉): 참봉(參奉) |
처_장인 | 전주이씨(全州李氏); 서성 부정(瑞城副正) 이덕식(李德植)의 딸 |
자녀 | (1자) 남봉년(南鳳年): 군수(郡守) (2자) 남규년(南虬年): 문과 급제, 형조 정랑(正郞)⋅예조 좌랑(左郞)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세주(南世周) |
총론
[1445년(세종 27)∼1504년(연산군 10) = 60세.]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홍문관 전한(典翰)⋅사헌부 지평(持平)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자(字)는 인보(仁父)이고, 호(號)는 송파(松坡)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경기 양주(楊州)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남익문(南益文)이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남수문(南秀文)의 조카이고, 사간원 헌납(獻納)남세담(南世聃)의 동생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사마방목>]
1487년(성종 18) 별시(別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3세였다.[<문과방목>]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1489년(성종 20)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는데, 그때 중시(重試)에서 대책(對策)을 짓게 하고 심사하여, 대교 남세주가 장원을 차지하니, 성종이 그 상으로 아마(兒馬: 망아지) 1필을 하사하였다.[『성종실록』 20년 8월 29일 1번째기사]
1491년(성종 22) 종6품하 선무랑(宣務郞) 사간원 수(守)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492년(성종 23) 경연(經筵)에서 검토관(檢討官)남세주가 성종에게 정도(正道)가 아니면 그 정책을 빨리 그만두어야 하며, 재변(災變)이 심하면 반드시 구언(求言)을 행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1493년(성종 24)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1494년(성종 25) 경기 도사남세주가 경기 여러 고을의 봄철 곡식을 파종하는 상황과 도내 각 고을에 흉년이 든 상황을 보고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고, 1497년(연산군 3)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응교(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예문관 응교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고, 또 각 도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할 때 충청도 지방에 어사(御使)로 나가서 각 고을 수령의 잘잘못을 염찰(廉察)하여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1498년(연산군 4) 함경도에서 흉년이 크게 들자, 구황 종사관(救荒從事官)에 임명되어, 함경도에 가서 두만강 유역의 경흥부(慶興府) 산하 여러 고을의 기민(饑民) 6천 60여 호를 진휼(賑恤)하니, 연산군이 남세주에게 사철 의복 각 1벌씩을 하사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12월 21일 1번째기사]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많은 유신(儒臣)들이 김종직(金宗直)의 사초(史草)에 연루되어 죽는 것을 본 남세주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경기 양주(楊州)로 돌아가 수년 동안 은거하다가 돌아갔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유순정(柳順汀)이 공초(供招)하기를, “남세주가 앞장서서 윤비(尹妃)의 폐출(廢黜)을 주장하였다.”하자, 연산군은 “남세주는 과연 궤이(詭異)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죄를 엄중히 논해야 마땅하니, 부관참시(剖棺斬屍)하도록 하라.”하면서, 결국 죽은 뒤에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곧고 정직하여 바른말 하기를 좋아하였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서 여러 차례 물건을 내려주는 은사(恩賜)를 입었으나, 바른 말을 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은 종부시(宗簿寺)에 전교하기를, “『선원록(璿源錄)』에서 남세주(南世周)와 그 자식들의 이름을 삭제하라.” 하였는데, 남세주의 부인이 전주이씨(全州李氏)였기 때문에 『선원록(璿源錄)』에 남세주와 그 자식들의 이름이 등재(謄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에 남세주와 그 자손들이 신원(伸寃)되었으며,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묘소와 후손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서성 부정(瑞城副正)이덕식(李德植)의 딸이다.[<방목>]
장남 남봉년(南鳳年)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차남 남규년(南虬年)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左郞)⋅형조 정랑(正郞)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뇌연집(雷淵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