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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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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곽천호 |
한글표제 | 곽천호 |
한자표제 | 郭天豪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정부(挺夫) |
호 | 죽창(竹窓)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8년(선조 1) |
사망 | 1628년(인조 6) |
본관 | 현풍(玄風) |
주거지 | 경기 안성(安城) |
증조부 | 곽순충(郭純忠) |
조부 | 곽율(郭慄) |
부 | 곽호선(郭好善) |
모_외조 | 권씨(權氏); 권보(權輔)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 홍씨(洪氏); 홍순검(洪純儉)의 딸 (둘째부인) 유씨(柳氏); 유공준(柳公準)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곽천호(郭天豪) |
총론
[1568년(선조 1)~1628년(인조 6) = 61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장령(掌令), 홍문관 교리(校理)이다. 자(字)는 정부(挺夫)이고, 호(號)는 죽창(竹窓)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거주지는 안성(安城)이다. 아버지는 곽호선(郭好善)이고, 어머니 권씨(權氏)는 권보(權輔)의 딸이다. 종묘령(宗廟令)곽지선(郭止善)의 조카이고, 안주목사(安州牧使)곽천성(郭天成)의 4촌 동생이다. 대북(大北)의 거두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의 문인(門人)이다.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 정인홍(鄭仁弘)의 추천으로 삼사(三司)에 주로 재직하면서 대북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폐모론에 앞장섰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이이첨 일당으로 지목되어, 처음에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사마방목>]
1605년(선조 38)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문과방목>]
1606년(선조 39)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가, 1607년(선조 40) 함경도 평사(評事)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1년(광해군 3) 공조 좌랑(左郞)이 되었다가, 함경도 도사(都事)로 나갔다. 함경도에 메뚜기 떼가 창궐하면서 흉년이 들자, 구황 정책이 긴급한 실정이었는데, 함경 도사곽천호는 구황하는 일에 경험이 없다고 하여 교체되었다. 광해군 초년에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1616년(광해군 8) 권점(圈點) 4점을 받고 홍문록(弘文錄)에 선록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1]
1617년(광해군 9)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 그해 대북 이이첨(李爾瞻) 일당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을 일으키자, 4촌형 곽천성(郭天成)과 함께 이에 앞장서서, 인목대비를 폐출하도록 광해군에게 청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정청에 반대하는 서인(西人)을 내쫓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자,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西宮)의 규모를 줄이라고 건의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들이 결국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1618년(광해군 10)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그해 6월에 재자관(齎咨官: 자문을 전달하는 관원)에 임명되어, 진주사(陳奏使) 박정길(朴鼎吉)과 함께 중국 산해관(山海關)으로 가서 명나라 경략(經略) 양호(楊鎬)에게 조선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명나라 군사와 함께 누르하치의 본거지를 협공하는 문제를 상의하였다. 다음해 도원수(都元帥)강홍립(姜弘立)이 부원수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만주로 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의 부차(富車)에서 대패하면서, 강홍립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後金)의 누르하치에게 항복하였다. 그 이후부터 광해군 재위 말년까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고, 홍문관 교리(校理)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대북(大北)의 이이첨 일당으로 지목되어 파직되고, 중도부처(中道付處)되었었는데, 안성(安城) 사람인 곽천호는 충청도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3]
1628년(인조 6) 대북 세력의 잔당인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면서, 전라도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3]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하음집(河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