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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49 기준 최신판



이 책은 조선 제27대 왕 순종(純宗)의 시문집이다.

개설

이 책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이 쓴 글들을 모은 시문집이다. 이 책에서 순종 즉위 이후의 저술 내용을 뒤집어보면, 순종 연간의 국내 사정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온갖 간교한 수법으로 우리나라의 실권을 장악, 끝내는 침략으로 발전하는 시대상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장서각에 유일본이 남아 있다.

편찬/발간 경위

순종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할 때까지 4년 간 재위한 마지막 왕이다. 왕실에서 태어나, 세자, 황태자를 거쳐 황제에 올랐지만, 순종이 생존했을 당시는 개항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어지러운 시기로 그 과정에서 순종은 어머니를 잃고, 부인 역시 잃었으며, 자의가 아닌 일본의 강제로 황위에 올라 황제로서 자국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었다.

순종이 자신의 감상이나 생각 혹은 정치적 구상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기록은 매우 적다. 다만 대내외적인 혼란 속에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건강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고종실록(高宗實錄)』이나 『순종실록(純宗實錄)』을 살펴보면,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으로 『정헌집(正軒集)』이 있으며, ‘장충단(獎忠壇)’ 비의 글씨와 여주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에 위치한 ‘명성황후탄강구리비’가 순종의 글씨라고 한다.

순종이 태어난 지 1년째인 1875년(고종 12) 1월 1일에 고종은 순종을 세자에 책봉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에 조정 중신들이 찬성하였고, 2월 18일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에서 순종의 세자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9세가 되던 1882년(고종 19) 1월 10일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15일에는 관례를 치루었다. 관례를 치룸과 동시에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으며, 좌찬성(左贊成)민태호(閔台鎬)의 집으로 정하여, 2월 19일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바로 훗날의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로 덕스러운 용모를 타고났으며, 성품이 유순했다고 한다.

서지 사항

10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사주쌍변이고, 반곽은 21.5×15.3㎝이다. 10행 20자의 반엽, 무흑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4×21.3㎝이며,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순종 연간에 필사한 것으로 서(序)·발(跋)이 없으며, 1972년 장서각에서 보수한 재장본(再裝本)이 전한다.

권1∼8에 춘궁록(春宮錄)으로, 시 35수, 연구 1편, 악장 41편, 치사(致詞) 19편, 전문(箋文) 4편, 행록 2편, 소(疏) 37편, 제문 603편, 영지(令旨) 9편, 권9에 서(序) 2편, 제문 16편, 권10에 조(詔) 71편, 비(批) 8편, 잡저 3편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체로 내용이 짧다.

악장· 치사· 전문 등은 모두 진연(進宴)이나 진찬(進饌)을 거행할 때 쓴 것이다. 소 역시 진연 및 윗대 후(后)·비(妃)들의 존호(尊號)의 가상(加上)을 청하는 것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사직하는 것들이다. 제문은 다례(茶禮)·별전(別奠)·작헌례(酌獻禮)·상식(上食)·면례(緬禮)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쓴 것이 대부분이다.

조의 ‘유신민조(諭臣民詔)’는 순종이 대소의 신민들에게 시국이 흔들리고, 질병의 고충이 심한 이 때 크게 경장(更張)하거나 변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민생을 구제하고 나라를 보존할 수 없기 때문에 ‘유신(維新)’의 두 글자를 국시(國是)로 삼아, 종사에 서고(誓告)한다고 하면서 한결같이 분발해 치안을 도모하도록 하라고 당부한 내용이다.

‘칙유사제신조(飭有司諸臣詔)’는 비도(匪徒)들이 일으킨 소요로 수천 호가 소실된 지방의 피해에 대해, 각 도의 도신· 수령에게 조속히 조사해 빠짐없이 피해 복구에 임하라는 내용이다.

잡저의 ‘사태자태사이등박문서(賜太子太師伊藤博文書)’는 일본인 이토(伊藤博文)의 공훈을 찬양하는 글이다. 이토가 순종에게 유신의 대업을 도운 것이나, 동궁을 위해 사부의 임무를 맡은 것은 모두가 동서열국의 관심과 한국과 일본의 공통된 이해에 의거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보호 관계를 확립해 안으로는 서정(庶政)의 개선을 지도하고 밖으로는 모든 국제적 임무를 관리함으로써 법률과 기강이 이때부터 신장되고, 나라가 점차 펴지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황실이 편안해지고, 영토가 온전해지고, 백성이 후생(厚生)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글은 일본의 압력 속에서 강제로 쓰인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조선 마지막 왕의 문학의식을 담고, 궁중의 의례를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지만, 일본의 압제 속에서 강제로 쓴 글들도 있어 패망한 국가의 애환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 김소영, 「순종황제의 南·西巡幸과 忠君愛國論」, 『한국사학보』 제39호, 고려사학회, 2010.
  • 임민혁, 「高·純宗의 號稱에 관한 異論과 왕권의 정통성」, 『사학연구』 제78호, 한국사학회, 2005.
  • 장을연, 「대한제국기 金冊의 현황과 양식적 특징」, 『고문서연구』 제46집, 한국고문서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