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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4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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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만기 |
한글표제 | 나만기 |
한자표제 | 羅萬紀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수백(壽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5년(선조 28) |
본관 | 안정(安定) |
주거지 | 서울[京] - 충청도 청주(淸州) |
증조부 | 나빈(羅濱) |
조부 | 나윤충(羅允忠) |
부 | 나인(羅紉); 문과 급제, 호조 정랑(正郞), 세자시강원 문학(文學) |
모_외조 | 풍양조씨(豊壤趙氏); 조찬(趙璨)의 딸 |
형제 | (동생) 나만섭(羅萬葉); 문과 급제, 형조 참의(參議) (동생) 나만원(羅萬元); 문과 급제, 여주목사(驪州牧使) |
처_장인 | 민씨(閔氏); 민여침(閔汝沈)의 딸 |
자녀 | (1자) 나성벽(羅星璧)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만기(羅萬紀) |
총론
[1595년(선조 28)∼졸년 미상.]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이다. 자(字)는 수백(壽伯)이다. 본관은 안정(安定)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만년에 충청도 청주(淸州)에 은거하였다. 아버지는 호조 정랑(正郞)나인(羅紉)이고, 어머니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조찬(趙璨)의 딸이다. 형조 참의(參議)나만섭(羅萬葉)과 여주목사(驪州牧使)나만원(羅萬元)의 형이고, 진사(進士)나성도(羅星度: 나만섭의 아들)의 삼촌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는데, 그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西人)과 대북(大北)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나만기는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인목대비를 폐출해야 하는 10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광해군에게 상소하고, 전국의 유림(儒林)들에게 통문을 돌렸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문과방목>] 당시 대북의 이이첨(李爾瞻)이 인목대비를 폐출하기 위하여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여 이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축출하고, 마침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나만기는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21년(광해군 13) 세자시강원 설서(設書)가 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에 서인(西人)에 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서인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 등은 죽음을 당하고, 나만갑 등은 유배되었다.
1629년(인조 7) 양이(量移: 유배지를 옮김)되었다가, 유배에서 풀려나서, 충청도 청주(淸州)에 은거하였다.
일화
1617년(광해군 9) 11월에 성균관 유생들이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고, 인목대비의 열 가지 죄목을 열거하여 광해군에게 상소하며 전국의 유림(儒林)들에게 통문을 보내었다. 그 인목대비의 죄목을 보면, 인목대비가 무당을 믿고 궁중에서 온갖 저주를 행하였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차례로 제시하였고, 또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시켜서 서인 세력과 결탁하여 무사를 동원하고 왜군의 원조를 얻어 쿠데타를 일으켜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쿠데타 계획을 보면, 영창대군에게 소속된 1천여 명의 종들을 단속하여 부서를 짜서 앞으로 위급한 일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역적들과 결탁하고, 무사들과 연락하여, 틈을 타서 모역(謀逆)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며, 내탕금(內帑金)을 후하게 주어, 왜국(倭國)의 후원을 얻어서 새 임금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배반하도록 한다는 등인데, 모두 실행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3] 특히 서양갑(徐羊甲)에게 내탕금을 주어서 왜국에 교섭하게 한다는 것은 <강변(江邊) 7우(友)> 사건의 주범 서양갑을 끌어들여서, 서인의 핵심 세력 집안도 함께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대북의 이이첨이 성균관 유생들을 사주하여, 이러한 상소문을 만들어 광해군에게 바치고 통문(通文)을 전국의 유림에게 돌리게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근거 없는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광해군 정권은 소수파 대북의 지지를 받았으나, 다수파 서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약체였다.
1623년(인조 1)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자, 전일에 인목대비의 죄목을 열거하여 상소한 유생들을 체포하여 조사하였는데, 성균관 유생 가운데 이에 참여한 유생들은 약 1백여 명이었다. 그 일을 주도한 장의(掌議)는 하인준(河仁俊)⋅정기(鄭淇) 두 사람이었고, 그 일을 실제로 맡았던 색장(色掌)은 채유제(蔡有濟)⋅나만기⋅정적(鄭績)⋅정미(鄭渼) 네 사람이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년 3월 17일] 사건에 가담한 모든 유생들은 귀양을 보냈으나, 사건을 맡아서 주도한 나만기 등 여섯 사람은 유적(儒籍)에서 그 명단을 삭제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유적에서 명단이 없어지면, 양반의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만기는 귀양에서 풀려나서 충청도 청주 지방에 은거하면서, 청주 서원(書院)에서 유적을 회복하고 유학자 행세를 하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사림의 큰 물의를 일으켰다.
부인과 후손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민여침(閔汝沈)의 딸이다. 아들 나성벽(羅星璧)은 아버지 죄에 연루되어 과거도 보지 못하고 하급 관직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