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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48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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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만갑 |
한글표제 | 나만갑 |
한자표제 | 羅萬甲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인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몽뢰(夢賚) |
호 | 구포(𩿨浦)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2년(선조 25) |
사망 | 1642년(인조 20) 윤11월 28일(병오일)[신도비명] 1642년(인조 20) 10월 11일[졸기] |
본관 | 안정(安定) |
주거지 | 서울[京] - 광주(廣州) 북방리(北方里) - 경상도 안동(安東) 영천(榮川: 지금 영주) |
묘소소재지 | 경기 광주(廣州) 북방리(北方里) 건지산(乾芝山)의 선영(先塋) |
증조부 | 나익(羅瀷); 적성현감(積城縣監)→(증) 홍문관 교리(校理), 성균관 전적(典籍) |
조부 | 나윤침(羅允忱); 문과 급제, 성균관 학유(學諭) |
부 | 나급(羅級); 문과 급제, 세자시강원 보덕(輔德) →(증) 영의정 |
모_외조 | 광주김씨(光州金氏); 한성부 참군(參軍) 김호선(金好善)의 딸 |
처_장인 | 초계정씨(草溪鄭氏); 의정부 참찬(參贊) 정엽(鄭曄)의 딸→(자녀) 4남 2녀 |
자녀 | (1자) 나성두(羅星斗); 세자익위사 시직(侍直), 해주목사(海州牧師) (2자) 나성한(羅星漢) (3자) 나성원(羅星遠) (4자) 나성위(羅星緯) (1녀) 이가상(李嘉相)의 처 (2녀) 박세주(朴世柱)의 처 |
저술문집 | 병자록(丙子錄), 구포집(鷗浦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만갑(羅萬甲) |
총론
[1592년(선조 25)∼1642년(인조 20) = 51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참의(參議)⋅병조 참지(參知)이고, 증직(贈職)은 의정부 좌의정이다. 자(字)는 몽뢰(夢賚)이고, 호(號)는 구포(𩿨浦)이다. 본관은 안정(安定)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만년에 경상도 안동(安東) 영천(榮川: 지금 영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나급(羅級)이고, 어머니 광주김씨(光州金氏)는 한성부 참군(參軍)김호선(金好善)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제자인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정파는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3년(광해군 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1등 장원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사마방목>]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이 북인(北人)의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도록 상소하자, 이들과 다시 어울리지 않았다. 인목대비가 마침내 서궁(西宮)에 유폐(幽閉)되자,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것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시고 경기 광주(廣州)로 낙향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서인(西人)에 의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었다. 그해 알성시(謁聖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1624년(인조 2)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심기원(沈器遠)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북방 지방에서 오랑캐의 침략을 방어하는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의 군사에게 한수(漢水) 이남에서 군량미와 군수 물자를 거두어 공급하였다.
1625년(인조 3)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고, 뒤이어 홍문관에 들어가서, 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당시 서인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공서파(功西派)와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는 청류 유학자의 청서파(淸西派)로 나누어졌는데, 공서파는 김류(金瑬)와 이귀(李貴) 등 무신(武臣)이 많았고, 청서파는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를 중심으로 젊은 유학자가 대다수였다. 공서파의 이조 판서김류(金鎏)가 북인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임명하자, 청서파(淸西派)가 이를 반대하였는데, 대북의 남이공은 광해군 때 서인을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홍문관 응교박정(朴炡)⋅부응교유백증(俞伯曾)⋅교리나만갑 등이 앞장서서 적극 반대하자, 이조 판서김류가 세 사람이 붕당을 이루어 이조를 비방한다고 모두 외직으로 좌천시켜버렸다. 이에 나만갑은 평안도 강동현감(江東縣監)으로 나갔는데, 마침 흉년을 만나서 평안도 지방 사람들이 굶주릴 때 정성을 다하여 구휼하여, 강동 고을에서는 한 사람도 굶어죽지 않았다. 공서파의 원로인 이귀(李貴)의 도움으로 나만갑은 소환되고 강등된 관직을 되찾게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扈從)하여 강화도에 피난 가서, 관리들의 풍기를 엄하게 다스리고 군사들에게 방어를 철저하게 하도록 독려하였다.
1628년(인조 6)환도해서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병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29년(인조 7) 이조 정랑(正郎) 임명을 둘러싸고 공서파와 청서파가 대립하였는데, 이조에서 이소한(李昭漢)⋅조경(趙絅)⋅나만갑을 의망(擬望)하자, 인조가 낙점(落點)하지 않고 다시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좌의정김류가 나만갑을 경조부박(輕佻浮薄)하다고 반대하였으나, 우의정김상용(金尙容: 김상헌의 형)은 나만갑을 적극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인조가 김류의 험담을 듣고 노하여, 나만갑을 유배시켰는데, 처음에 충청도 아산(牙山)에 유배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海州)로 이배(移配)하도록 명하였다. 공서파의 최명길(崔鳴吉)과 청서파의 장유(張維)가 인조에게 각각 나만갑을 변호하다가, 장유는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나주목사(羅州牧師)로 좌천되었다.
1631년(인조 9) 공서파의 영의정김류(金瑬)가 죄를 지어 파직당하자, 인조가 특별히 나만갑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 이에 헌납나만갑이 공신(功臣)과 외척(外戚)의 사치가 도에 지나치다고 공격하였으므로, 공신과 외척들이 나만갑을 매우 싫어하였다.
1632년(인조 10)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안동의 사람들이 나만갑의 덕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에서 나만갑이 안동부사로 부임할 때 성혼(成婚)한 자식들을 데리고 부임하였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1635년(인조 13) 형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죄인의 석방하는 일로써 좌의정오윤겸(吳允謙)을 비난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하였다. 좌의정오윤겸이 죄인을 석방하는 서류를 바로 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우의정김상용(金尙容)이 형조 참의나만갑을 변호하였으나, 인조는 나만갑의 오만불손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여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45일 동안 싸웠는데, 나만갑이 관량사(管糧使: 관향사)에 임명되어, 남한산성에 비축된 식량을 관리하였다. 남한산성 안에서 공서파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 등은 청나라와 화해를 주장하였고, 청서파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은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는데,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가 격렬하게 싸우자, 인조가 관량사나만갑을 불러서 남한산성에 비축된 군량마를 물었다. 관량사나만갑이 대답하기를, “원래 수효는 6천여 석인데, 현재는 2천 8백여 석이 남아 있습니다.” 하고, 식량이 떨어질 때가지 청나라 군사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나만갑이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기록한 것이 『병자록(丙子錄)』이다. <병자호란> 때 나만갑의 어머니가 충청도 서산(瑞山)으로 피난 갔다가, 1637년(인조 15) 어머니가 80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나만갑은 충청도 관선(官船) 한 척을 사서 어머니를 운구하여 경기 광주(廣州)의 선영(先塋)에 묻었다. 반대파에서 나만갑이 관선을 사서 이용하였다고 탄핵하여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다. 나만갑은 유배지 영해에서 3년 동안 어머니 상복을 입고 몹시 슬퍼하였다.
1639년(인조 17) 유배지 영해(寧海)에서 상복(喪服)을 벗었다.
1640년(인조 18) 사면을 받고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경상도 안동(安東)에 있는 영천(榮川: 지금 영주)으로 이사를 갔는데, 서울의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서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서 군사를 심양(瀋陽)으로 보내어,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는 일을 돕는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3백 년 동안 명나라와 군신(君臣)의 의리가 오늘날에 이르러 끊어지게 되었다.” 하고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비분(悲憤)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에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유배 생활에서 얻은 병이 점차 위독해져 1642년(인조 20) 윤11월 28일(병오일)에 새로 이주한 안동 영천(榮川)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1세였다. 경상도 관찰사(觀察使)가 나만갑의 죽음을 조정에 보고하자, 인조가 나만갑에게 관작(官爵)을 되돌려주게 하고 예조에서 부조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전에 임금을 호종(扈從)한 공로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대신(大臣)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저서로는 『병자록(丙子錄)』이 있고, 문집으로는 『구포집(鷗浦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기가 세고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였다.[『인조실록』 3년 5월 17일 2번째기사] 이상이 고상하고 지략이 많으며, 기개를 숭상하고 담론을 잘하여,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매우 자애로웠는데, 어머니가 늙어서 실명(失明)하자 정성을 다하여 지팡이 노릇을 하였고, 외할머니와 홀로 된 고모들을 함께 모시고 1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시종 온 가정이 화목하였다. 사람과 사귈 때에 다급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도와주었으므로, 수몽(守夢) 정엽(鄭曄)이 제자 나만갑을 칭찬하기를, “어린 임금이라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다.”하고, 증자(曾子: 공자의 제자)의 말을 인용하고 자기 딸을 위해서 찾던 사윗감이라고 여기고 제자를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 나만갑은 하루 종일 손님을 상대하더라도 아첨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대뜸 면전에서 얼굴이 붉어지도록 꾸짖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이를 잊어버린 듯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신도비명] 그러므로 나만갑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인조는 나만갑이 청서파의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붕당(朋黨)을 짓는다고 생각하여, 매우 싫어하였다.
아버지 나급이 큰아들을 잃고 후사(後嗣)를 걱정하던 차에 꿈에 신인(神人: 신선)이 나타나서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는데, 꿈을 꾸고 얼마 안 되어 아들을 얻었으므로, 신인이 명(命)한 바대로 이름을 ‘만갑(萬甲)’이라고 짓고 자(字)를 ‘몽뢰(夢賚)’라고 자어서, 그 기쁨을 기념하였다. 나만갑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라 호방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놀이를 할 때 진(陣)을 치고 여러 아이들을 지휘하였는데, 나이가 많고 힘이 센 아이들도 두려워서 감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이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운자(韻字)를 내어주고 글을 짓게 하면, 달리는 말처럼 글을 재빨리 지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천리마(千里馬)’라고 불렀다. 나만갑은 벼슬할 때 부임하는 부서마다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법을 지키려고 윗사람에게 항거하다가, 여러 차례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파직되거나 귀양을 갔다. 그 뒤에 임금이 비로소 그의 충직함을 깨닫고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였으나, 마지막 한번 유배당하여,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말았다.[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광주(廣州) 북방리(北方里) 건지산(乾芝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1643년(인조 21) 3월에 안동 영주(榮州)에서 경기 광주(廣州)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신도비명] 인조 때 정사(靖社)의 공훈으로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 초계정씨(草溪鄭氏)는 의정부 참찬(參贊)정엽(鄭曄)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나성두(羅星斗)는 익위사 시직(侍直)와 해주목사(海州牧師)를 지냈고, 차남은 나성한(羅星漢)이고, 삼남은 나성원(羅星遠)이고, 사남은 나성위(羅星緯)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이가상(李嘉相)에게, 차녀는 박세주(朴世柱)에게 각각 시집갔다.[신도비명] 손자(孫子) 나양좌(羅良佐: 나성두의 아들)는 유일(儒逸)로서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다.[족보] 손녀(孫女: 나성두의 딸)는 안동김씨 김광찬(金光燦: 김상헌의 아들)에게 시집갔는데, 영의정김수흥(金壽興)⋅영의정김수항(金壽恒) 형제의 어머니가 되었다. 장인 수몽(壽夢) 정엽(鄭曄: 1563∼1625)은 김장생(金長生: 송시열의 스승)⋅장현광(張顯光)과 비견할 만큼 유명한 유학자인데, 그가 죽은 뒤에 사위 나만갑이 그 유고를 정리하여 『수몽집(守夢集)』을 편찬하였고, 외손자 나성두가 현종 때 해주목사로 나가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서문(序文)을 받아서 해주 관아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구포집(鷗浦集)』
- 『강한집(江漢集)』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언(記言)』
- 『낙전당집(樂全堂集)』
- 『낙정집(樂靜集)』
- 『남계집(南溪集)』
- 『농암집(農巖集)』
- 『동계집(桐溪集)』
- 『동리집(東里集)』
- 『동명집(東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오집(晩悟集)』
- 『만운집(晩雲集)』
- 『만회집(晩悔集)』
- 『명곡집(明谷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목민심서(牧民心書)』
- 『묵재일기(黙齋日記)』
- 『문곡집(文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강집(白江集)』
- 『백담유집(白潭遺集)』
- 『백헌집(白軒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북저집(北渚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고(象村稿)』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서하집(西河集)』
- 『석담집(石潭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소암집(疎菴集)』
- 『소재집(疎齋集)』
- 『송애집(松崖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곡집(壽谷集)』
- 『수곡집(睡谷集)』
- 『수몽집(守夢集)』
- 『식암유고(息庵遺稿)』
- 『약천집(藥泉集)』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외재집(畏齋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우복집(愚伏集)』
- 『월당집(月塘集)』
- 『월사집(月沙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이재유고(頤齋遺藁)』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자저(自著)』
- 『잠곡유고(潛谷遺稿)』
- 『제호집(霽湖集)』
- 『죽천집(竹泉集)』
- 『죽하집(竹下集)』
- 『지봉집(芝峯集)』
- 『지천집(遲川集)』
- 『지촌집(芝村集)』
- 『지호집(芝湖集)』
- 『창주유고(滄洲遺稿)』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탄집(秋灘集)』
- 『태천집(苔川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해사록(海槎錄)』
- 『현주집(玄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