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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48 기준 최신판




총론

[1437년(세종 19)∼1478년(성종 9) = 42세.] 조선 전기 세조~성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정랑(正郎)⋅승문원 교리(校理)이고,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이다. 자(字)는 언승(彦昇)이고, 호(號)는 영극(寧極)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參判)노숙동(盧叔仝)이고,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풍천(豐川) 유학자 생원(生員) 김점(金點)의 딸이다. 이조 판서(判書)노진(盧禛)의 조부이다.

세조 시대 활동

1462년(세조 8)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문과방목>] 풍저창 승(豊儲倉丞)에 임명되었다가, 인수부 승(仁壽府丞)으로 옮겼다. 그 뒤에 승문원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예문관 봉교(奉敎)를 겸임하였다.

1466년(세조 12) 의정부 주서(主書)가 되어,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고, 예문관 봉교(奉敎)도 그대로 겸임하였다. 같은 해 세조가 조정의 문관에게 실시한 발영시(拔英試)에 3등(等)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문과방목>]

1467년(세조 13) 병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어, 예문관 봉교(奉敎)와 승문원 교리(校理)를 겸임하였다. 사직서 령(社稷署令)으로 옮겼다가, 경상도 도사(都事)로 나갔다. 그 뒤에 형조 정랑(正郎)에 임명되어, 승문원 교리(校理)를 겸임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2년(성종 3)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완성하였는데, 승문원 교리노분이 그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고 하여, 성종이 향표리(鄕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형조 정랑노분이 동료 병조 정랑권호(權湖)의 청탁으로 노비(奴婢) 송사(訟事)를 잘못 처리하였다가, 성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성종실록』 3년 10월 28일 6번째기사] 이에 노분은 고향 경상도 함양(咸陽)으로 돌아왔는데, 세상일에 다시 관심이 없어져, 오로지 술을 마시고 시(詩)를 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옛날 살던 초가집이 눅눅하고 비좁았으나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살다가, 질병에 걸려서 1478년(성종 9) 3월 28일 고향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42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고지식하고 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업이 남보다 뛰어나서 일찍이 각종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문과와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올라서 10여 년 동안 세조⋅예종⋅성종의 3대를 거치며 벼슬살이를 순탄하게 하다가, 형조 정랑과 승문원 교리로 있을 때 노비 송사(訟事)를 잘못 처리하여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학생(學生) 권계주(權繼珠)가 양녀(良女) 어운(於云)의 아들 귀동(貴同)을 자기의 계집종 순비(順非)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또 중손(仲孫)⋅중비(仲非)도 순비(順非)의 소생이 아닌데도 그 소생이라고 우기고, 귀동⋅중손⋅중비 세 사람을 자기 종으로 강제로 차지하였다. 1472년(성종 3) 10월에 노비 송사(訟事)가 일어났는데, 형조 정랑노분이 형조 좌랑(佐郞)양수사(楊守泗)와 함께 병조 정랑권호의 청탁을 받고 귀동⋅중손⋅중비 세 사람을 학생 권계주의 종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 뒤에 이것이 잘못된 판결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의금부에서 율(律)에 따라서 노분에게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도형(徒刑) 3년으로 처벌하였다.[『성종실록』 3년 10월 28일 6번째기사] 그때 성종이 대노하여 노분을 파직시켰는데, 노분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고향 함양(咸陽)으로 돌아와서, 오로지 술만 마시고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66년(세조 12) 노분이 의정부 주서(主書)로 있을 때 세조의 조카 영순군(永順君: 광평대군의 아들)과 사이에 일어난 일화다. 어느 날 내전(內殿)에서 작은 연회를 베풀고 여러 가지 기악(妓樂)이 울리고 무녀(舞女)들이 한창 춤을 추고 있을 때 영순군이 내전으로 들어와서 주서(注書)노분에게 찾아가서 묻기를, “오늘 당직 승지(承旨)는 누구인가.”하였는데, 영순군이 세조에게 급히 아뢰고자 하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순군(永順君)은 학문을 좋아하고 몸을 조심하였으므로, 세조가 영순군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주서노분이 술을 한잔 마시고 여러 무희(舞姬) 가운데 소천금(笑千金)의 춤을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홀려 있다가, 영순군이 당직 승지가 누구인가를 갑자기 묻자, 엉겁결에 대답하기를, “소천금입니다.” 하였다. 영순군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노분이 실성하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고 한다.[『동각잡기(東閣雜記)』]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함양군(咸陽郡) 북쪽 부롱(釜壠)의 언덕에 있는데, 손자 노진(盧禛)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 있다.[『옥계집(玉溪集)』 권3]

부인 신씨(愼氏)는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신선경(愼先庚)의 딸인데,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다. 장남 노우량(盧友良)은 진사(進士)이고, 차남 노우명(盧友明)은 진사(進士)로서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냈고, 삼남 노우영(盧友英)은 진사(進士)로서 영경전 참봉(永慶殿參奉)을 지냈다. 손자 노진(盧禛: 노우명의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判書)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각잡기(東閣雜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옥계집(玉溪集)』
  • 『청파극담(靑坡劇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