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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8일 (월) 15:47 기준 최신판



이 책은 조선시대 명나라의 사신과 조선의 원접사(遠接使)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시집이다.

개설

이 책은 조선시대에 중국 명(明)나라에서 온 사신과 조선 관반과의 수창시를 엮어 만든 시집이다. ‘황화’라는 이름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황황자화(皇皇者華)’에서 따온 말로 사신을 가리킨다.

조선은 명나라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사대의 측면에서 그들과의 교류를 매우 중시하였다. 특히 명나라는 학문과 사상의 시발지로 여겨져 조선의 관각문신들은 명나라 사신과의 시문 수창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조선조 시화에 명나라 사신의 시 감식안이 대서특필되며, 그에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한 본국인의 재능이 과장되어 기술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따라서 조정에서도 사신이 올 때면 문신뿐 아니라 재야에서도 시 창작의 능력이 탁월한 자를 특별히 발탁하여 관반으로 임명하였으니, 권필(權韠), 홍유손(洪裕孫), 정두경(鄭斗卿)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또한 명나라 사신은 한시의 본고장에서 온 사람이니 만큼 문신들이 그들이 쓴 시의 풍격을 모방하려는 경향도 강하였다. 이에 대해서 조선 후기의 유몽인(柳夢寅)이나 김만중(金萬重) 같은 이는 오히려 비판적인 관점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1450년(세종 32)에 『경오(庚午) 황화집』이 나온 이후 『황화집』 발간은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어 명나라 말인 1633년(인조 11)까지 계속 발간되었으며, 1773년(영조 49)에는 각 시대의 『황화집』을 모아 50권 25책으로 간행한 바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조선의 의도와 명나라 사신들의 정치적 목적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조선은 『황화집』을 통해 조선의 문화적 수준을 밝히고, 이를 통해 명나라로부터 주변의 여타 국가와는 다른 차별적 지위를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조선에 사행 온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에서 간행된 『황화집』을 통해 황제와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자신을 선정관(善政官), 목민관(牧民官)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는데, 각기 다른 두 가지 목적의 달성에 『황화집』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황화집』의 간행에는 당대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들이 거의 모두 투입되었지만, 그들의 시문(詩文)은 다양한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그들의 시문이 전적으로 명나라 사신의 시에 대한 차운(次韻)과 화답(和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문인들의 시는 기본적으로 창조성이 제한된 형식적 완벽성에 치중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 문인들의 시는 근본적으로 문학성, 예술성이 제한된 시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황화집』에 수록된 시가 문학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문의 창작 주체가 당대 조선 최고의 문인들이었고, 그들이 명나라 사신들과 주고받은 시의 평가를 통해 그 자신의 문학적 성가를 분명하게 인정받고 드러내려 했었다는 점에서 『황화집』의 문학적 가치의 검토는 『황화집』의 편찬 의도와 가치, 그리고 당대 조선 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과 함께 『황화집』이라는 문집의 특수한 상황과 이 책의 소재 시문을 창작했던 창작자들의 특수한 처지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화집』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그 자체의 타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지 사항

1책(3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교서관목활자(校書館木活字, 세조 명편)이다. 4주쌍변이고, 반엽광곽은 25.2×16.7cm이다. 10행 18자, 주쌍행, 상하화문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5×22.1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중국 명나라 사신이 처음으로 조선에 온 1450년(세종 32)부터 1633년(인조 11)까지 180여 년 간 24차례에 걸쳐, 양측이 주고받은 시를 모아 편집하였다. 그 뒤 개별적으로 전해 오던 것을 1773년(영조 49)에 영조의 명으로 다시 수집· 정리해 간행하였다. 여기에 실린 명나라의 사행은 명나라 황제의 등극이나 복위, 황태자의 탄생이나 책립을 알리는 조서를 전달하는 일과 조선왕에게 시호를 내리는 일이 위주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원접사를 의주(義州)까지 보내어 맞아, 이들과 동행하여 서울에 들어오게 하였고, 사신이 돌아갈 때에는 원접사를 반송사(伴送使)로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중국의 사신으로 문신(文臣)이 올 때에는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하여, 그들을 영송(迎送)하게 하였다. 이 『황화집』은 1450년 명나라 경제(景帝)의 등극조사(登極詔使)로 조선에 왔던 예겸(倪謙)·사마 순(司馬恂)과 원접사 정인지(鄭麟趾) 및 종사관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이 창화한 시들을 편찬하고, 간행한 『세종경오황화집(世宗庚午皇華集: 경태경오황화집(景泰庚午皇華集))』을 비롯하여, 『인조계유황화집(仁祖癸酉黃華集: 숭정계유황화집(崇禎癸酉皇華集))』에 이르기까지, 즉 1450~1633년에 23회에 걸쳐 간행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무종등극조사(武宗登極詔使) 서목(徐穆)의 시는 『성종임자황화집(成宗壬子皇華集)』에 합부되었으며, 1773년에 한 질(帙)로 합본하여 중간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실린 시의 작자는 명나라 사신과 이를 맞는 조선의 원접사(또는 접반사) 및 그 관료들이다. 그 사행명·사신명·원접사·편(서)자 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참여했기 때문에 많다.

시의 내용은 명나라 사신이 도착하고, 헤어질 때의 환영이나 전별에 관한 것과 압록강에서 맞이해 한양에 이르는 동안의 여로에서 베풀어지는 연회나 산천 경치를 읊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행의 목적이나, 당시의 사상적·철학적 관심을 주제로 한 것도 있다. 이 시들은 평면적으로 보면 그다지 주목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국 외교 담당자들의 외교관계 속에서 읊어진 것이므로, 그 기법이나 수준이 높다. 또한 당시의 사상·외교에 관한 내용들을 엿볼 수도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양국 간의 외교·정치·문화의 교류와 조선 전기의 지리·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 김기화, 「『皇華集』의 編纂과 刊行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제39집, 한국서지학회, 2008.
  • 김은정, 「『皇華集』 출현 배경으로서의 世宗의 국가경영」, 『열상고전연구』 제56집, 열상고전연구회, 2017.
  • 안장리, 「朝鮮 前期 『皇華集』 및 明使臣의 朝鮮關聯書籍 出版에 대한 연구」, 『국어교육』 제107호, 한국어교육학회, 2002.
  • 유기수, 「『皇華集』의 刊行과 收錄된 明詞에 관한 考察」, 『중국학연구』 제47집, 중국학연구회, 2009.
  • 윤재환, 「『皇華集』의 編纂 意圖와 文學的 價値 再考-『皇華集』 逸序文과 『皇華集』 關聯 資料를 中心으로-」, 『고전과 해석』 제21집, 고전한문학연구학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