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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3일 (수) 01:00 기준 최신판



한양의 종로에서 비단전[縇廛], 백목전(白木廛), 면주전(綿紬廛), 저포전(苧布廛), 지전(紙廛), 어물전(魚物廛) 등 여섯 종류의 물품을 취급하던 가게들을 통칭한 말.

개설

육의전은 17세기부터 등장한 사상(私商)의 활발한 상업 활동과 새로운 시전 창설을 배경으로, 국역 조달 업무와 자율적 통제 업무를 맡았던 6개의 시전을 말한다. 육의전은 중국 비단을 취급하는 비단전, 무명과 은을 취급하는 백목전, 국산 명주를 취급하는 면주전, 모시류를 취급하는 저포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 어물을 취급하는 어물전 등이었다. 육의전은 17세기 이후 금난전권을 기반으로 사상의 급속한 성장에 대응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8세기 조선 정부는 시전의 도거리를 방지하고 영세 상인의 자유 상업을 보호하기 위해 통공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육의전은 그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에 개항 전까지도 육의전의 특권적 지위는 굳건히 유지되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왕조의 성립 이후 시전은 도시 건설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시전 설치는 1412년(태종 12)부터 1414년(태종 14)에 걸쳐 4단계로 이루어졌다. 혜정교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길, 대궐문에서 정선방 입구에 이르는 길, 종루부터 경복궁에 이르는 길, 창덕궁에서 종묘에 이르는 길, 종루에서 남대문까지, 종묘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길에 시전 건물이 들어섰다. 조선 정부는 이 시전을 일정한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공랑세(公廊稅)를 받아들였다.

조선 시전은 크게 3가지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서울 시민의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기능이다. 두 번째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국고 잉여품을 처분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시전 상인은 일종의 국역 부담의 의무를 떠안고 있었는데 그 부담률이 높은 상점을 육의전으로 구별해서 인식했다.

대신 육의전은 정부의 수요품을 독점 조달하는 특권과 국고의 잉여품을 독점 불하 받는 특권을 보장받았다. 또한 동일 조합원 이외의 상인들이 그들과 같은 물품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권한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금난전권의 권리를 강력하게 내세우지는 않았다. 아직 서울에 허가된 시전 이외의 상인 즉 사상이 나타나지 않았고, 시전만으로도 시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변천

16세기 이후 서울 시전 상업계에 변화가 나타났다. 농민들이 본업인 농업을 버리고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기 위해 서울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도시 상업인구가 증가하고, 시전 상가 이외의 여러 곳에 새로운 시장이 서게 되었다. 양란을 겪고 난 뒤인 17세기부터는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려드는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민간 상인에 의한 외국 무역이 발달하여 국내 상업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금속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상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 결과 서울 인구는 총 20만을 넘어섰다. 이 결과 사상이 급증하고 시전 상인과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졌다. 시전 상인들은 사상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상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정부로부터 같은 상품을 독점적으로 매매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 즉 금난전권을 인정받았다. 금난전권은 특정 시전이 정부로부터 독점 매매권을 얻은 상품을 다른 시전 상인이나 사상이 매매하는 경우, 독점 매매권을 얻은 상인이 그 상품을 압수하고 그 상인을 정부에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조선 정부는 시전 상인들에게 일정한 물품을 정기적으로 거두어들이는 대신 그들에게 금난전권을 인정하였다. 금난전권은 처음부터 모든 시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규모가 가장 큰 6개의 시전에게 주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육의전 이외의 상인도 금난전권을 갖게 되었다. 사상이 담배 시전인 엽초전(葉草廛)의 금난전권을 피해 절초전(折草廛)을 만들고, 메주를 만드는 상인조합을 새로 만들어 독점권을 인정받는 방식 등을 통해, 도시민의 생활품 대부분이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의 대상이 되어갔다.

금난전권의 확대 강화는 도시 상공업의 유통질서를 크게 흔들었다. 시전 상인 마음대로 물건 값을 정하여 물가가 치솟았고, 이는 도시 소비자층 특히 가난한 도시민의 생활을 위협했다. 도시 소상공인과 영세 수공업자 역시 모든 시전의 강력한 금난전권 행사에 설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시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난전은 줄기차게 성장하여 마침내 1791년(정조 15)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이른바 신해통공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육의전은 이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개항 전까지 그 특권적 지위가 유지되었다. 육의전은 개항 이후 밀려드는 외국 상품에 맞서 나름대로 저항해보기도 했으나, 국역 부담과 금난전권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몰락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만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출판부, 1973.
  • 고동환, 『서울상업사』, 태학사, 2000.
  • 오성, 『조선시대 상인 연구』, 일조각,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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