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量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8년 1월 3일 (수) 01:0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양안 |
한글표제 | 양안 |
한자표제 | 量案 |
상위어 | 양전(量田) |
동의어 | 전안(田案), 도행장(導行帳) |
관련어 | 행심책(行審冊), 깃기[衿記], 타량(打量), 계묘양전(癸卯量田), 갑술양전(甲戌量田), 경자양안(庚子量案) |
분야 | 경제/재정/전세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오인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양안(量案) |
전근대 정부가 군현 단위로 토지를 필지별로 조사하여 작성한 토지대장.
개설
양안은 왕조 국가에서 왕이 토지에 대하여 행사하는 권력의 상징물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군현마다 양안을 3부씩 작성하여 군현·감영·호조에 각각 1부씩 비치하였다. 각 군현은 전세를 수취하기 위해 매년 양안을 베껴서 기재 사항의 변화를 조사하였는데 이를 행심책(行審冊)이라 하였다. 행심책에 등록된 전체 필지는 다시 양안상의 소유주인 기주(起主)별로 종합되어 조세대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를 깃기[衿記]라 하였다. 따라서 양안은 가장 체계적이며 근원적인 전근대사회의 토지대장으로서 전세 행정과 토지소유권 확정을 위한 원천적 근거로 기능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근대사회에서 정부가 양안을 작성한 일차적인 목적은 전세를 수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세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어디에 위치한 토지에서 얼마의 세금을 누구에게 받느냐를 기재한 토지대장이 필요하였다. 즉, 수취 대상의 위치, 수취 전세액, 전세 부담자가 기재된 토지대장이 필요한 것이었다. 문제는 토지대장에 기재할 토지의 위치·세액·부담자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를 결정하는 것은 당시 사회의 구체적인 기술 수준과 사회문화적인 성향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일단 작성된 토지대장은 반드시 모든 실재의 토지 형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양안의 토지소유권 확인 기능이 파생되었다. 즉, 양안은 실재 필지의 점유 여부를 확인해 주는 근거가 되었다.
각 군현의 양안이 작성되는 과정은 (1)실제의 측량 과정, (2)측량 결과를 초안으로 작성하는 과정, (3)작성된 초안을 검토하는 과정, (4)검토 결과에 따라 정안(正案)을 작성하는 과정으로 나뉘었다. (1)의 과정은 실무자들이 야외에서, (2)의 과정은 수령의 감독 아래 아전들이 관청에서, (3)의 과정은 양전사 혹은 균전사가 감영에서, (4)는 군현에서 각각 행하며, 완성된 정안은 거두어서 양전사 혹은 균전사가 최종적인 검토를 한 후에 군현·감영·호조에 각각 1부씩 보내었다.
내용
현재 남아 있는 양안은 조선시대 이전에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확인 가능한 것은 조선시대 자료뿐이다. 군현양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720년 조선 숙종대의 경자양안이었다. 이를 통하여 전형적인 전근대 양안의 기재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양안에는 각 필지의 위치, 면적, 진기(陳起) 여부, 소유주의 4개 영역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4개 영역의 정보는 다양한 항목으로 구체화되어 등록되었다. 위치에 관한 정보는 자호·지번·양전 방향·사표(四標) 등이었다. 면적에 관한 정보는 전품·전형·장광척수·결부수 등이었다. 진기 여부는 진(陳)·기(起)로 구분하였고, 소유주 난에는 해당 인물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필지의 위치에 관한 정보는 각 필지의 이웃 필지를 순차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므로 상대적인 위치 파악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제의 필지를 양안에서 확인하거나 양안에 등록된 필지를 실제 필지로서 확인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따라서 특정 필지가 누락되거나 잘못 기록되더라도 감독자가 확인하기 어려우므로 전세 행정의 중간 농간을 용이하게 하였다. 또 토지소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필지의 위치를 정확히 입증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는 방식이었다. 각 군현은 이러한 양안을 토대로 행심책과 깃기를 작성하여 조세 행정 장부로 사용하였다. 각 개인은 양안에 등록된 각 필지의 기재 사항을 등사한 문서나, 그것을 근거로 작성한 각종 토지문서를 통하여 토지소유권을 입증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양안으로서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경자양안뿐이어서 양안의 변천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록을 토대로 간략한 변화상을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양안의 기본적인 기재 양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즉, 6등전품제에 입각하여 상이한 면적에서 동일한 전세액을 나타내는 결부제(結負制), 5결마다 천자문 1자씩을 부여하는 자호제(字號制), 점유자를 기주(起主)로 표기하는 방식 등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양안에는 얼마간의 변화가 있었다. 1601년(선조 34)의 계묘양안은 경작지만 등록하고 진황지를 등록하지 않았다. 1634년(인조 12)의 갑술양안은 경작지와 진황지 모두를 등록하였지만 기주의 등록에서 양반지주층은 노비 이름을 자기 이름 대신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1720년(숙종 46)의 경자양안에서는 노비 이름을 대신 쓰는 경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체적으로 경자양안은 토지대장으로서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한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조선후기 경자양전 연구』, 혜안, 2008.
- 이영훈,「양안의 성격에 관한 재검토-경상도 예천군 경자양안의 사례분석」, 『역사학보』 102, 1984.
- 이재룡,「16세기의 양전과 진전수세」,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8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