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화문(興化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9일 (토) 21:19 기준 최신판



경희궁의 정문.

개설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興化門)이며 이 외에도 궁궐로 들어가는 문은 4개가 더 있었다. 궁궐의 동쪽에는 흥화문보다 북쪽으로 조금 올라간 위치에 흥원문(興元門)이 있었고,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을 두었다. 현재는 흥화문만 남아 있다.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이다.

위치 및 용도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의 남동쪽에 위치하여 동향을 하고 있었다. 현재는 숭정전(崇政殿) 아래쪽에 위치하여 남향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경희궁 터에 학교를 세우면서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였다가 다시 경희궁 터에 왔을 때에는 그 자리에 이미 다른 건물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흥화문은 대궐로 출입하는 정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했다. 왕이 흥화문에 나아가 친히 백성들의 어려움을 듣기도 했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과 베를 하사하거나, 유랑민들에게 죽을 먹이기도 하였다. 죄인을 신문하기도 하고 죄수를 석방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1620년(광해군 12)에 창건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4월 9일에 왕이 흥화문 공사를 명했다. 당시 인경궁의 정문도 함께 공사하였는데, 인경궁의 정문은 창덕궁 돈화문의 예에 따라 중층으로 조성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4월 9일). 그러나 경희궁의 흥화문은 단층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인경궁은 이궁으로 지었고 경희궁은 임시 피우처(避寓處)로 사용할 별궁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피우처란 화재나 질병 등으로 왕이 궁궐을 옮겨야 할 때 사용하는 곳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조 때 인경궁을 철거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하면서 경희궁은 조선후기 동안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흥화문은 큰 손상 없이 경희궁의 정문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흥화문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1915년 흥화문이 경희궁의 남쪽으로 옮겨졌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를 건립하면서 옮겨다가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흥화문은 경춘문(慶春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춘무(春畝)를 경사스럽게 한다는 의미인데, 춘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특별시의 경희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경희궁으로 다시 옮겨오게 되었다.

형태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이며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의 정문과 달리 단층 건물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흥화문은 그 안으로 함부로 가마를 타고 들어올 수 없는 경계의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1626년(인조 4) 12월 30일 봉림대군(鳳林大君)이 흥화문 안에서 가마를 탔다고 하여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인조실록』 4년 12월 30일). 이 사건은 며칠이 지난 1627년(인조 5) 1월 3일, 봉림대군이 흥화문 밖에서 교자를 탔다고 간원에게 말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인조실록』 5년 1월 3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 궁궐1』, 국립중앙박물관, 2007.
  •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경희궁 영조 훼철관련 사료조사 및 활용방안 연구』, 서울특별시, 2004.
  •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편, 『궁궐지Ⅱ: 창경궁·경희궁·도성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6.
  • 최종규, 「경희궁 복원을 위한 전각배치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