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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51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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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성길 |
한글표제 | 이성길 |
한자표제 | 李成吉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 |
집필자 | 최양규 |
자 | 덕재(德哉) |
호 | 창주(滄洲)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2년(명종 17) |
사망 | 1621년(광해군 1) 4월 26일 |
본관 | 고성(固城)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지금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 |
증조부 | 이린(李潾) |
조부 | 이운손(李雲孫) |
부 | 이정려(李精瓈) |
모_외조 | 문화 유씨(文化柳氏) : 유경인(柳敬仁)의 딸 |
처_장인 | 전주 이씨(全州李氏) : 이수도(李守道)의 딸 |
작품 | 「쌍포승첩도(雙浦勝捷圖)」,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성길(李成吉)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27년 11월 19일, 『선조실록』 29년 4월 20일, 『선조실록』 30년 2월 12일, 『선조실록』 34년 1월 22일, 『선조실록』 34년 1월 30일, 『선조실록』 35년 9월 22일, 『선조실록』 36년 4월 5일, 『선조실록』 36년 9월 4일, 『선조실록』 37년 1월 23일, 『선조실록』 38년 11월 4일, 『선조실록』 40년 4월 8일, 『광해군일기』 1년 8월 3일, 『광해군일기』 5년 2월 30일, 『광해군일기』 9년 10월 16일, 『광해군일기』 9년 11월 25일 |
총론
[1562년(명종 17)~1621년(광해군 1) = 60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병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덕재(德哉)이고, 호는 창주(滄洲)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이정려(李精瓈)이고,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승문원 박사(博士)유경인(柳敬仁)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운손(李雲孫)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이린(李潾)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진사과에 장원(壯元)을 하였다. 그 해 증광(增廣)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방목(榜目)』]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수도의 수비를 맡은 유도대장이양원(李陽元)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한강 방어에 실패하면서 양주(楊州)로 철수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함경북도 경성(鏡城)으로 갔다. 그곳에서 북평사(北評事)정문부(鄭文孚)의 의병활동에 적극 동참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그 공을 인정받아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선조실록』 27년 11월 19일) 1596년(선조 29) 북청판관(北靑判官)이 되었다가 함흥판관(咸興判官)으로 전임되었는데, 1597년(선조 30) 병으로 교체되었다.(『선조실록』 29년 4월 20일),(『선조실록』 30년 2월 12일) 1601년(선조 34)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이 되었다가, 외방으로 나가 여산군수(礪山郡守)가 되었다.(『선조실록』 34년 1월 22일),(『선조실록』 34년 1월 30일) 1602년(선조 35) 형조 정랑(正郞) 재임 시에는 함경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선조실록』 35년 9월 22일) 1603년(선조 36) 왕이 문무겸전한 관료를 얻기 위하여, 문무관을 모두 모아 치르는 활쏘기 시합에서 수석을 하여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선조실록』 36년 4월 5일) 그해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으나, 사마시(司馬試) 복시(覆試)의 시관(試官)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선조실록』 36년 9월 4일) 1604년(선조 37) 외방으로 나가 합천군수(陜川郡守)가 되었고, 1605년(선조 38) 덕원부사(德源府使)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7년 1월 23일),(『선조실록』 38년 11월 4일) 1607년(선조 40)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40년 4월 8일)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1611년(광해군 3) 종부시(宗簿寺) 정(正)과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8월 3일) 1613년(광해군 5)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광해군일기』 5년 2월 30일) 1617년(광해군 9) 분조(分朝)의 병조 참의(參議)와 병조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10월 16일),(『광해군일기』 9년 11월 25일) 1621년(광해군 13)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다가 금교역(金郊驛)에서 병사하였다.
한편 이성길은 문무를 겸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임진왜란 당시 진중에서 그린 「쌍포승첩도(雙浦勝捷圖)」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가 전해진다.
성품과 일화
이성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호매(豪邁)하며 남에게 구애되지 않았다.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하였고 또 재간이 많아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성질이 거칠고 차분하지 못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포천(抱川) 치소의 남쪽 수원산(水源山)(현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명산리)에 있고, 신후재(申厚載)가 지은 묘지명이 남아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수도(李守道)의 딸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규정집(葵亭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고대일록(孤臺日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청음집(淸陰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내암집(來庵集)』
- 『농포집(農圃集)』
- 『다산집(茶山集)』
- 『천파집(天坡集)』
- 『백헌집(白軒集)』
- 『백주집(白洲集)』
- 『구전집(苟全集)』
- 『고주집(孤舟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