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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50 판




총론

[?~? = ?]. 조선 5대 임금인 문종(文宗)의 세자빈이자 폐세자빈(廢世子嬪). 문종이 세자일 때 들일 두 번째 세자빈이다. 본관은 하음(河陰)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지사(知事)봉여(奉礪)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절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한 봉유례(奉由禮)이다. 오라버니는 봉극화(奉克和), 봉극유(奉克柔)이며, 여동생은 각각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이면(李綿)의 처와 반조(潘造)의 처이다.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이었지만, 궁녀 소쌍(召雙)과 동침한 일이 발각되어 폐출되었다.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문종의 세자빈

봉순빈(奉純嬪)은 아버지인 봉여와 어머니인 평산 신씨의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427년(세종 9) 세종(世宗)은 문종의 세자빈으로 김오문(金五文)의 딸을 간택하여 휘빈(徽嬪)에 봉하였다.(『세종실록(世宗實錄)』 9년 4월 9일) 그러나 2년 후인 1429년(세종 11) 문종에게 압승술(壓勝術)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김휘빈은 폐출되었다.(『세종실록』 11년 7월 20일) 이에 세종은 두 번째 세자빈을 간택하기로 하고, 그해 10월 봉여의 딸을 순빈(純嬪)으로 봉하였다.(『세종실록』 11년 10월 15일)

그러나 봉순빈과 문종의 사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이를 걱정한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는 항상 이들을 가르치고 타일렀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문종과 봉순빈의 사이가 조금씩 개선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후사를 두지는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문종의 후궁을 들이기로 결정하고,(『세종실록』 18년 10월 26일) 1431년(세종 13) 세자인 문종의 후궁을 정식으로 간택하였다. 이 때 가산군지사(嘉山郡知事)권전(權專)과 직예문관(直藝文館)정갑손(鄭甲孫), 장흥고(長興庫) 직장(直長)홍심(洪深)의 딸이 선택되었다.(『세종실록』 13년 1월 19일) 그리고 세종은 이들을 승휘(承徽)로 삼았다.(『세종실록』 13년 3월 15일)

그런데 본래 시기와 질투가 심하던 봉순빈은 문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지 못하자 원망과 앙심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훗날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되는 후궁 권승휘(權承徽)가 임신을 하자 더욱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봉순빈은 항상 궁인에게 권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들은 쫓겨나야 한다고 말하였고, 때로는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다. 세종은 문종에게 비록 여러 승휘가 있지만 정적(正嫡)에서 아들을 두는 것만큼 귀한 것은 없으니 정적을 물리쳐 멀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문종은 봉순빈을 가까이 하였고, 어느 날 봉순빈이 태기(胎氣)가 있다는 말을 하였으므로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봉순빈은 낙태(落胎)를 하였다며 여종에게 이불 속에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으니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불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봉순빈은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세종실록』 18년 10월 26일)

임신 소동 이후에도 봉순빈의 기행은 그치지가 않았다. 1435년(세종 17) 문종이 종학(宗學)으로 옮겨 거처할 때 봉순빈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 또 궁궐 여종에게 항상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는데,[『세종실록』세종 18년 10월 26일 2번째기사] 대개는 세자를 사랑하는 내용이었다.[『세종실록』세종 18년 11월 7일 1번째기사] 술을 즐겼던 봉순빈은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셔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였고, 간혹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기도 하였다. 술이 모자랄 때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였다.[『세종실록』세종 18년 11월 7일 1번째기사] 이 외에도 궁인을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구타하기도 하였고, 궁중 물건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을 친정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봉순빈이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으로 돌아왔다.

그런 가운데 봉순빈은 궁녀 소쌍(召雙)을 사랑하여 항상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궁인들은 세자빈이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봉순빈의 생활에 의심을 품었다. 봉순빈이 이전에는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하였는데, 소쌍과 함께 동침한 이후로는 자신이 직접 이불과 베개를 거둘 뿐만 아니라 몰래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소쌍과 동침한 이후부터 봉순빈은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소쌍이 잠시라도 자신의 곁을 떠나기라도 하면 원망하고 화를 냈다는 증언도 등장하였다. 소쌍이 후궁 권승휘의 사비(私婢)인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하여 함께 자기도 하자, 봉순빈이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돌았다.(『세종실록』 18년 10월 26일)

세종은 이전까지의 일에 대해서는 그냥 내버려 두었지만, 봉순빈과 소쌍의 동침 사건은 묵과하지 않았다. 교지에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봉순빈에게 문제가 많다며 봉순빈을 폐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인으로 삼아 사제(私第)로 돌려보냈던 것이다.(『세종실록』 18년 10월 26일) 또한 세종은 봉순빈이 폐출되기 3개월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 봉여의 고신(告身)도 추탈(追奪)하였다.(『세종실록』 18년 7월 12일),(『세종실록』 18년 11월 4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두환, 『문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 한희숙, 「조선 태조·세종 대 세자빈 폐출 사건의 의미」, 『한국인물사연구』14,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