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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8 판




총론

[?~1786년(정조 10) = ?].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正祖)의 후궁.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성윤우(成胤祐)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성수산(成壽山)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성근립(成謹立)이다.

정조의 후궁

성의빈(成宜嬪)은 어릴 때 궁녀로 궐에 들어왔다가 정조의 승은을 입고 상의(尙儀)에 제수되었다. 1782년(정조 6) 9월 7일 정조의 첫 번째 아들을 낳았으니, 이 아이가 문효세자(文孝世子)이다.(『정조실록』 6년 8월 26일),(『정조실록』 6년 9월 7일) 아들의 출산을 계기로 그녀는 같은 해 12월 소용(昭容)에 올랐으며,(『정조실록』 6년 12월 28일) 이듬해인 1783년(정조 7) 2월 다시 정1품 의빈이 되었다.(『정조실록』 7년 2월 19일)

1784년(정조 8) 호산청(護産廳)이 설치되고 딸을 낳았으나,(『정조실록』 8년 윤3월 20일) 1786년(정조 10)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났으며, 성의빈은 그해 9월 셋째 아이를 임신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성의빈이 사망하자 정조는 그녀의 장례를 영조(英祖)의 후궁이었던 이영빈(李暎嬪)의 예에 따라 1등 후궁의 예로 치루라 명했다.(『정조실록』 10년 9월 14일),[『일성록』정조 10년 9월 14일 4번째기사] 성의빈의 빈소는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차려졌고,(『정조실록』 10년 9월 16일) 그해 11월 20일 장례가 치러졌다.(『정조실록』 10년 11월 20일),[『일성록』정조 10년 11월 20일 2번째기사]

이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문효세자와 성의빈의 잇단 죽음에 대해 언문 전교를 내려 이들의 죽음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며 역적의 토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탕약과 수라를 폐하겠다고 하였다.(『정조실록』 10년 12월 1일) 이 일로 송낙휴(宋樂休)가 김우진(金宇鎭)·구선복(具善復) 등이 상계군(常溪君)이담(李湛)을 추대할 것을 모의했다고 고변하였다.(『정조실록』 10년 12월 6일) 결국 구선복과 구명겸(具明謙)은 사형에 처해졌고, 김우진(金宇鎭)은 제주(濟州)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정조실록』 10년 12월 9일),(『정조실록』 10년 12월 10일)

묘소와 후손

성의빈의 무덤은 본래 효창묘(孝昌墓 : 현 효창공원)의 왼쪽 산등성이였는데,(『정조실록』10년 11월 20일) 일제강점기이던 1944년 왕실 관련 묘들을 이전할 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의 서삼릉 경내 후궁 묘역으로 이전되었다. 1970년 서삼릉이 사적 제200호로 지정될 때 함께 지정되었다. 정조가 내린 어제비가 남아있다.

성의빈은 정조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문효세자이순(李㬀)으로 1782년(정조 6) 정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2년 후인 1784년(정조 8) 8월 세자로 책봉되었다.(『정조실록』 8년 7월 2일),(『정조실록』 8년 7월 3일),(『정조실록』 8년 8월 2일) 그러나 5세가 되던 1786년(정조 10) 홍역에 걸려 그해 5월 11일 창덕궁 별당에서 세상을 떠났다.(『정조실록』 10년 5월 3일),(『정조실록』 10년 5월 10일)(『정조실록』 10년 5월 11일) 사후 시호를 ‘온효(溫孝)’로 정하였다가,(『정조실록』 10년 5월 14일) 며칠 후 ‘문효(文孝)‘로 변경하였다.(『정조실록』 10년 5월 22일)

1녀는 1784년(정조 8) 윤3월 20일 태어났으나 1년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순조실록』 16년 1월 21일)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무보(武譜)』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