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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7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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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도장 |
한글표제 | 이도장 |
한자표제 | 李道長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태시(泰始) |
호 | 낙촌(洛村)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03년(선조 36)[방목]1604년(선조 36)[비문] |
사망 | 1644년(인조 22) |
본관 | 광주(廣州) |
주거지 | 경상도 성주(星州)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성주 다촌 동쪽 언덕 |
증조부 | 이준경(李遵慶) |
조부 | (양조부)이광복(李光復)(생조부)이희복(李熙復) |
부 | (양부)이영우(李榮雨)(생부)이윤우(李潤雨) |
모_외조 | (양모)동래 정씨(東萊鄭氏) : 정서(鄭恕)의 딸 (생외)인천 채씨(仁川蔡氏) : 채응린(蔡應麟)의 딸 |
형제 | (형)이도창(李道昌)(동생)이도장(李道章) |
처_장인 | 안동 김씨(安東金氏) : 김시양(金時讓)의 딸 →(자녀)4남 4녀 |
자녀 | (1자)이원정(李元禎) (2자)이원록(李元祿) (3자)이원례(李元禮) (4자)이원지(李元祉) (1녀)장영(張銢)의 처 (2녀)권두망(權斗望)의 처 (3녀)곽전(郭鐫)의 처 (4녀)박명징(朴明徵)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도장(李道長) |
총론
[1604년(선조 36)∼1644년(인조 22) = 41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의 문신.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와 이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고, 이조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자는 태시(泰始)이며, 호는 낙촌(洛村)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양부(養父)는 주부(主簿)이영우(李榮雨)이고, 양모(養母)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정서(鄭恕)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공조 참의(參議)이윤우(李潤雨)이고, 생모(生母)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성균관 생원(生員) 채응린(蔡應麟)의 딸이다. 어려서 정구(鄭逑)에게 수학하다가, 나중에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 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30년(인조 8)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8세였다. 처음에 승문원 권지(權知)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34년(인조 12) 사근도(沙斤道) 찰방(察訪)이 되어 고을의 낡은 폐습을 개혁하고 1년 만에 사직하자, 그곳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의 덕을 추모하였다. 그해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는데, 그때 생부 이윤우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향 성주(星州)로 돌아가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치고 다시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청(淸)나라 오랑캐 군사에게 길이 막히는 바람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간 후 청나라 태종의 오랑캐 군사에게 포위되어 45일 동안 공방전을 벌렸다. 이때 오랑캐 군사가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날로 심각하게 공격을 하며 상황이 아주 위급해지자, 인조가 공경(公卿) 대신으로부터 위사(衛士)·졸병에 이르기까지 각각 임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때 승정원 주서였던 이도장이 여러 사람의 발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인조도 이를 유심히 지켜보았고,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도 모두 서로 돌아보며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 등과 함께 청나라 태종(太宗)과 삼전도(三田渡)에서 만나서 강화(講和) 조약을 맺었다.
1637년(인조 15) 겨울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1638년(인조 15) 여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삼사(三司) 청요직(淸要職)에 연달아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이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는데, 이때 청나라 심양(瀋陽)에서는 명(明)나라 정벌을 위해 필요한 수군(水軍)을 조선에서 징발하여 보내도록 강요하였다. 그러자 주화파 인사들이 “출병하는 것이 의리에 크게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으므로, 인조는 그 주장을 받아들여 청나라에 수군을 징발하여 보내려고 하였다. 이에 이조 좌랑이도장은 척화파(斥和派)이던 김상헌(金尙憲)의 주장을 지지하여, 청나라에 군사를 보내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1639년(인조 17)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고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으나,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이 싫어 늙은 부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를 대고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다. 부임한 지 1년 만에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고 간교한 아전의 횡포가 없어졌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군수의 치적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과로로 쓰러지면서 중풍에 걸리는 바람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성주(星州)로 돌아왔다. 생부 이윤우가 담양군수(潭陽郡守)로 있다가, 과로로 쓰러지면서 중풍에 걸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과 똑같았다. 고향에서 몸을 정양하는 동안에 조정에서 연달아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로 임명하고 불렀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만 시무(時務)를 논한 상소만을 올렸다. 뒤에 조정에서 홍문관 응교(應敎)와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임명하고 불렀으나 모두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1644년(인조 22) 11월 18일에 중풍으로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41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도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영민하고 충직하며, 행실이 청렴하고 독실하였다. 어린아이 때에 아버지 이윤우에게 학기(學記)와 4서(書)를 배워서, 『대학(大學)』·『중용(中庸)』의 글을 줄줄 외웠으므로,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다. 아버지 이윤우가 자기의 스승 정온에게 보내어 학문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정온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장현광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도장은 통달한 식견과 민첩한 재주가 있었다. 널리 학문을 배우고 재치가 있어서, 일을 논할 때마다 기미를 잘 알고 대처하여 남들이 따를 수 없는 바가 많았다. 가정생활을 보면, 부모 형제에게 효도와 우애를 잘했고, 부모의 상(喪)과 조상의 제사에 독실하게 정성을 다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충애(忠愛)와 친친(親親 : 부모 형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의리를 확고히 지키고 재물을 탐하지 말고 청렴하게 지내며, 착하지 못한 일을 보면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멀리 하도록 하였다.
1636년(인조 14)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태종이 오랑캐 기병 12만여 명을 이끌고,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義州城)⋅평양성(平壤城)⋅안주성(安州城) 등을 피해 곧바로 서울로 직행하였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청 태종의 목적은 조선을 점령하는 것보다 조선의 항복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2월 14일 밤 눈이 내리는데, 오랑캐의 선봉 부대가 경기도 땅에 도착하였다. 오랑캐의 기병이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5일 만이었다. 인조가 급히 강화도로 피난 가려고 서두르자, 승정원 주서이도장이 영의정김류를 만나서 건의하기를, “사태가 매우 긴박한데, 급히 출병하여 오랑캐의 길을 끊지 않고, 경망하게 임금을 거둥하시게 했다가, 갑자기 변고라도 생긴다면, 상국(相國)께서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고 하였다. 영의정김류가 처음에는 주서 이도장의 건의를 별로 귀담아 듣지 않다가, 이윽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4초(哨 : 초소)의 병사들을 출동시켰다. 병사들이 출동해 보니, 오랑캐가 이미 서울 근교로 가까이 들어와 있어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오랑캐에 의하여 막혀버렸다. 이에 인조 일행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이보다 며칠 전에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대궐의 비빈(妃嬪)들 및 여러 궁녀들과 왕자, 문무백관의 가족들은 모두 이미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이때 대신들 가운데 다수가 인조에게 건의하기를, “밤중에 남한산성을 빠져나가서 빨리 말을 달려 나가면, 금방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으나, 소수의 대신이 위험하다고 반대하여, 결론이 나기 전에 성안의 사람들이 소란스러웠다. 승정원 주서이도장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데, 이런 계책을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결연히 성을 지킬 계책을 써야 하며, 분명하게 맹세하고 계칙해서 성안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즉시 무장(武將)들에게 남한산성을 지킬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하였다. 또 대신들에게 성안에서 지켜야 할 계칙을 마련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성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스스로 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5일 훈련대장신경진(申景禛)이 서울에서 뒤따라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오자, 수립된 계획에 따라서 1만 3천여 명의 군사를 4부대로 나누어, 신경진이 동성(東城)을 맡고, 구굉(具宏)이 남성(南城)을 맡고, 이서(李曙)가 북성(北城)을 맡고, 이시백(李時白)이 서성(西城)을 맡았다. 이에 성안에 들어간 1만 3천여 명이 성을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면서 모두 안정을 되찾아, 45일 동안 오랑캐 군사와 공방전을 끈질기게 벌일 수 있었다. 다음날인 12월 16일 청나라 마부대(馬夫臺)가 이끄는 선봉 부대가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리고 1637년(인조 15년) 1월 1일에는 청나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12만 명의 오랑캐 군사를 총집결시켜, 남한산성을 수겹으로 에워싸고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성주(星州) 다촌(茶村) 동쪽 언덕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이도장의 선대가 6대에 걸쳐 경상도 성주에 살았으므로 선대의 장지가 모두 성주에 있다. 1664년(현종 5) 장남 이원정(李元禎)의 벼슬이 현달하면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김시양(金時讓)의 딸인데, 자녀는 4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이원정은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차남 이원록(李元祿)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3남 이원례(李元禮)는 일찍 죽었고, 4남은 이원지(李元祉)은 좌랑(佐郞)을 지냈다. 장녀는 별검(別檢)장영(張銢)에게, 차녀는 권두망(權斗望)에게, 3녀는 곽전(郭鐫)에게, 4녀는 박명징(朴明徵)에게 각각 시집갔다. 장남 이원정의 맏아들 이담명(李聃命)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고, 둘째 아들 이한명(李漢命)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차남 이원록의 둘째 아들 이기명(李基命)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주집(東州集)』
- 『기언(記言)』
- 『동계집(桐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부계기문(涪溪記聞)』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성호전집(星湖全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한강집(寒岡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