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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7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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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명겸 |
한글표제 | 이명겸 |
한자표제 | 李鳴謙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계승범 |
호 | 지상재(地上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본관 | 벽진(碧珍)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이군상(李君常) |
조부 | 이희경(李希慶) |
부 | 이신지(李愼之) |
모_외조 | 권씨(權氏) : 권옹(權雍)의 딸 |
처_장인 | 조씨(曹氏) : 조맹수(曹孟修)의 딸 → 1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명겸(李鳴謙)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5년 7월 7일, 『세종실록』 17년 6월 8일, 『세종실록』 20년 2월 27일, 『세종실록』 21년 11월 13일, 『세종실록』 24년 7월 29일, 『세종실록』 31년 8월 19일, 『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8일, 『문종실록』 1년 9월 2일, 『문종실록』 1년 9월 28일, 『단종실록』 즉위년 12월 11일, 『단종실록』 1년 2월 8일, 『단종실록』 1년 7월 1일, 『단종실록』 1년 10월 19일, 『단종실록』 1년 10월 28일, 『단종실록』 2년 8월 5일, 『단종실록』 2년 12월 2일, 『단종실록』 3년 3월 28일, 『세조실록』 1년 윤6월 27일, 『세조실록』 1년 윤6월 27일,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
총론
[?~?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박사(博士)와 제주목사(濟州牧使),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지냈다. 호는 지상재(地上齋) 또는 산수재(山水齋)이다.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초계(草溪)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이신지(李愼之)이고, 어머니 권씨(權氏)는 권옹(權雍)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우왕(禑王) 때 경상도병마도원수(慶尙道兵馬都元帥)를 지낸 이희경(李希慶)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군상(李君常)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23년(세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방목(榜目)』] 1433년(세종 15) 세종은 풍수학(風水學)을 잘 아는 자를 경연에 불러 그 이치를 강론하게 하고자 했다. 이때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안숭선(安崇善)이 풍수학은 난잡한 것이지만 강론에 굳이 참여시키려거든 경학에 밝은 신하를 선택해 강습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집현전 부교리(副校理)이명겸과 유의손(柳義孫) 등을 학관으로 삼았다.(『세종실록』 5년 7월 7일) 1435년(세종 17) 이명겸은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했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 이듬해인 1438년(세종 20) 세종은 이명겸에 대해 “나이가 젊고 기백이 날카로우며, 문무의 재주가 있다”고 평가하며,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이천(李蕆)에게 이명겸을 경력(經歷)으로 삼고 막부의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의논하도록 명했다.(『세종실록』 20년 2월 27일)
1439년(세종 21)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거쳐, 1442년(세종 24) 제주도경차관(濟州道敬差官)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21년 11월 13일) 같은 해 그는 제주가 땅이 좁아 경작을 모두 금지하면 백성들의 생계유지가 어렵다고 상소했다. 그러므로 한라산 목장과 옛 목장에서 모두 밭을 가꾸게 하되 한라산 목장에서 말을 방목하면 옛 목장에서는 밭은 가꾸게 하고, 옛 목장에서 말을 방목하면 한라산 목장에서는 말을 방목하는 형식으로 서로 바꿔가며 말을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으며, 세종은 이를 따랐다.(『세종실록』 24년 7월 29일) 1449년(세종 31) 제주목사를 사직하고자 했지만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세종실록』 31년 8월 19일)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文宗)이 제주에 들어온 왜인(倭人)을 붙잡은 안무사(按撫使)이명겸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고, 배를 거느리고 따라가 붙잡은 사람들에게도 포상을 내렸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8일) 이듬해인 1451년(문종 1) 이명겸은 이축(李畜)과 함께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에 올랐다.(『문종실록』 1년 9월 2일) 이런 가운데 이명겸은 제주는 사면이 바다이므로 방어가 제일 중요한데 전함(戰艦)이 없어 방도가 없다면서 지금부터라도 제주의 요해지(要害地)에 전함을 나누어 정박시키고 방비를 엄하게 하기를 청하자, 문종이 병조에 이 의견을 의논하게 했다.(『문종실록』 1년 9월 28일)
1452년(단종 즉위년) 형조 참의(參議)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강원도 관찰사에 이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역임했다.(『단종실록』 즉위년 12월 11일),(『단종실록』 1년 2월 8일),(『단종실록』 1년 7월 1일) 그해 10월 이명겸의 매부인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허추(許錘)는 이 둘의 인척 관계를 들어 이징옥을 이명원이 있는 강원도에 안치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나 단종(端宗)이 윤허하지 않았다.(『단종실록』 1년 10월 19일) 이후 이명겸은 앞서 이징옥의 일로 강원도 도관찰사에서 잠시 물러났는데, 이징옥 부자(父子)와 그 세력을 모두 잡아 죽인 이후 복직되었다.(『단종실록』 1년 10월 28일) 1454년(단종 2) 한성부윤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표문(表文)과 해청(海靑)을 받들고 명(明)나라에 갔다.(『단종실록』 2년 8월 5일),(『단종실록』 2년 12월 2일),(『단종실록』 3년 3월 28일),(『세조실록』 1년 윤6월 27일)
1455년(세조 1) 칙서를 받들고 명나라로부터 돌아왔으며, 얼마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세조실록』 1년 윤6월 27일),(『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후손
부인 조씨(曹氏)는 조맹수(曹孟修)의 딸로 본관은 알 수 없으며, 슬하에 아들 하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만가보(萬家譜)』]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만가보(萬家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