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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6 판




총론

[1437년(세종 19)~1509(중종 4) = 73세]. 조선 중기 세조(世祖)~중종(中宗) 때의 문신. 창평현령(昌平縣令) 등을 지냈다. 자는 백시(伯時)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윤인(李尹仁)이고,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만호(萬戶)홍중량(洪仲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낸 이계번(李繼蕃)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안무사(按撫使)이신(李伸)이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기도 하다. 세조(世祖) 때에 박팽년에게 연좌되어 벼슬을 하지 못하다가 성종(成宗) 때에 어머니 남양 홍씨가 정려(旌閭)를 받으면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셋째아들 이원(李黿)이 에 연루되어 참형(斬刑)을 당하자, 연좌되어 해남(海南)으로 귀양을 갔다 온 후 은거하였다.

세조~ 중종 시대 활동

이공린은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다. 아버지 이윤인(李尹仁)은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박팽년·성삼문(成三問) 등과 가깝게 지냈으므로, 이공린은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박팽년의 외동딸과 혼인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할 때 집현전 부제학(副提學)박팽년은 편수관(編修官)으로, 통례문(通禮門) 봉례(奉禮)이윤인은 기사관(記事官)으로 각각 참여하였다. 갑자사화 당시 사초(史草)를 조사하다가, 박팽년·이윤인 두 사람이 아주 가깝게 지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20세가 되던 1456년(세조 2) 장인 박팽년이 성삼문 등과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하려는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을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극형을 받았다. 이에 사위 이공린도 반역죄에 연좌되어 금고형(禁錮刑)을 받아 30여 년 동안 관직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

1453년(단종 1) 세조 일파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실권을 잡자 아버지 이윤인은 시세를 따랐고, 그리하여 세조 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또 예종(睿宗) 때에는 평양부윤(平壤府尹)이 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평양부윤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아들 이공린은 어머니 남양 홍씨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부모를 받들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가운데 1470년(성종 1) 아버지 이윤인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부임한 지 1년도 안 되어, 등창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경기 마전(麻田)에 아버지 묘소를 만들고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시묘살이는 남자들이 하고 여자들은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음에도 어머니 남양 홍씨 또한 여막(廬幕)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신주를 아버지 이윤인이 살아 있을 때처럼 모셨다. 1474년(성종 5) 이공린의 집에 불이 났을 때에는 어머니 남양 홍씨가 사당에 모셔져 있던 남편 이윤인의 신주를 품속에 간직하고 나왔다. 그리하여 1479년(성종 10) 나라에서는 남양 홍씨의 정문(旌門)을 세우고 그 아들 이공린을 등용하였다.(『성종실록』 10년 3월 11일)

1482년(성종 13) 이공린은 잠시 무반(武班)의 관직에 등용되었다가 뒤에 추천을 받아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가 되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을 겸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사헌부에서 “겸 참군(參軍)이공린은 나이가 많은데다가 경력조차 없습니다.”고 탄핵하였는데, 이공린이 임실현감(任實縣監)에 임명되자, 사헌부에서 또 다시 이공린을 탄핵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2월 25일),(『연산군일기』 4년 7월 6일),(『연산군일기』 4년 7월 8일) 그때 유자광(柳子光)이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서 김종직의 사림파(士林派)를 제거하였다. 그런데 이공린의 셋째아들 이원이 김종직의 제자였으므로, 이원은 김종직의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평안도 곽산(郭山)으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에 전라도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었다.(『연산군일기』 6년 5월 7일) 그 사이에 이공린은 흥덕현감(興德縣監)·함열현감(咸悅縣監)·창평현감(昌平縣監)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아전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그 은혜를 기렸다.

그런 가운데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廢妃)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이공린의 셋째아들 이원도 이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자 이공린도 연좌되어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10월 24일)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면서 이공린은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주(淸州)에 은거하였다. 3년 동안 조용히 살다가, 1509년(중종 4) 노병으로 청주의 본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공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순박하고 자질이 아름다웠으며, 원대한 기상이 있었다.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홀로 된 어머니를 항상 곁에서 모시고 정성껏 보살폈다.

1470년(성종 1) 3월 아버지 이윤인이 평안도관찰사 겸 평양부윤에 임명되자, 부인 남양 홍씨와 아들 이공린을 데리고 함께 갔는데, 이윤인이 평양에 부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1471년(성종 2) 등창이 나서 평양 감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 남양 홍씨는 너무 슬퍼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바람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으나, 아들 이공린의 극진한 간호로 목숨을 건졌다. 이공린은 아버지의 무덤을 경기도 마전에 만들고 안장하였는데, 무덤을 만들 때 어머니 남양 홍씨가 광중(壙中)에 두 칸을 만들게 하여, 다음에 자신이 묻힐 칸을 미리 마련하게 하였다. 어머니 남양 홍씨는 무덤 곁에다 여막을 지어 놓고, 아들 이공린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무덤 앞에 치전(致奠)하고 항상 슬프게 울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만두지 않았다. 3년 상을 마치고, 그 여막에 신주를 안치한 후 아침저녁으로 신주에게 상식(上食)을 올렸다. 또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무덤에 음식을 올리고, 사철 새로 나오는 물건도 빠짐없이 올렸다.

1474년(성종 5) 이공린의 집에 불이 났는데, 어머니 남양 홍씨가 사당에 있던 남편 이윤인의 신주를 거두어 품속에 간직하고 나오면서, 집안의 살림이 불에 타는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집안사람이 어머니 홍씨에게 말하기를, “신주를 잠시 상위에 얹어두고, 타다가 남은 가재를 좀 챙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 하니, 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내가 이처럼 놀라고 두려워하는데, 신주가 얼마나 두려워서 떨겠는가.”하며, 신주만을 품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또 이공린이 서울에서 맏아들 이오(李鼇)의 초례(醮禮)를 치르게 되자, 어머니 남양 홍씨에게 혼사를 가서 보도록 간청하였다. 그러자 어머니 남양 홍씨가 거절하기를, “내가 비록 가까운 이웃에도 왕래하지 않는 것은 신주가 잠시라도 혼자 외로워 할까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멀리 서울에 나들이 가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고, 끝내 서울로 가서 맏손자의 혼사를 보지 않았다. 어머니 남양 홍씨가 죽을 때 병세가 위독하자 집안사람들이 무당을 청해서 푸닥거리를 하려고 하였는데, 부인 홍씨가 만류하기를, “내가 평생 무당을 믿지 않았는데, 굿을 한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죽으면 마땅히 남편과 함께 있게 될 터인데, 죽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여 살기를 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운명할 때는 헛소리를 중얼거렸는데, 마치 남편 이윤인과 서로 만나서 다정스럽게 이야기하는 듯하였다.[『사숙재집(私淑齋集)』 권7]

1479년(성종 10) 3월 예조에서는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의 계본(啓本)에 따라 아뢰기를, “마전에 사는 죽은 관찰사이윤인의 아내인 정부인(貞夫人) 홍씨(洪氏)가 지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산소 옆에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친히 치전하고 항상 슬프게 울었습니다. 또 그 집에 두 번이나 불이 났는데, 자신이 불길을 무릅쓰고 신주를 품에 안고 나왔습니다. 무릇 철따라 나는 물건과 새로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바쳤으며, 종신토록 지키는 절조를 변하지 않았으니, 그 품행이 특이합니다. 청컨대 정문(旌門)을 세우고 그 아들을 서용하도록 하소서.” 하니, 성종이 하교하기를, “그렇게 함이 좋겠다.”고 하였다.(『성종실록』 10년 3월 11일) 이에 아들 이공린은 어머니 남양 홍씨의 정절 덕분에 장인 박팽년의 연좌에서 풀려, 벼슬길에 나가서 함열수령과 창평수령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산17에 있는데,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무덤은 쌍분으로, 부인 순천 박씨(順天朴氏)와 나란히 묻혀 있다.

부인 순천 박씨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딸이다. 자녀는 아들만 여덟을 두었다. 이오·이구(李龜)·이원·이타(李鼉)·이별(李鼈)·이벽(李鼊)·이경(李鯁)·이곤(李鯤)인데, 모두 재주가 있었다. 장남 이오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차남 이구·3남 이원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장남 이오는 이조 좌랑(佐郞)을 지냈고, 차남 이구는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으며, 3남 이원은 예조 좌랑을 지냈다. 4남 이타·5남 이별·6남 이벽은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4남 이타는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5남 이별은 진사시에서 장원하였으며, 6남 이벽과 7남 이경은 진사이고, 8남 이곤은 학업을 크게 성취하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았다. 아들 8형제가 모두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으므로, 경주 이씨 집안에서는 이공린을 8별(鼈: 자라)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당시 풍습에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보다 사마시의 생원과(生員科)·진사과에 장원하는 것을 더욱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장남 이오·4남 이타·5남 이별이 모두 사마시에 장원하자, 사람들은 박팽년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학문으로 대성한 사람은 3남 이원·5남 장륙당이별·8남 이곤이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이요정집(二樂亭集)』
  • 『기언(記言)』
  • 『미수기언(眉叟記言)』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숙재집(私淑齋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