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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6 판




총론

[1733년(영조 9)~1752년(영조 28) = 20세].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찬성(贊成)에 증직된 이유번(李楡蕃)의 딸 이영빈(李暎嬪)이다. 친언니로는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있으며, 나머지 3명의 친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친남동생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이고, 친여동생은 화완옹주(和緩翁主)이다. 부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영성위(永城尉)신광수(申光洙)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화협옹주(和協翁主)는 1733년(영조 9) 영조와 이영빈의 1남 6년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11세가 되던 1743년(영조 19 ) 화협옹주로 봉해졌다.(『영조실록』 19년 2월 18일) 동생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2살 차이였는데, 가례 순서를 두고 영조는 신하들과 생각이 달랐다. 신하들은 종묘사직의 주인은 세자라며 사도세자의 가례를 먼저 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세자의 지위가 있다하더라도 형제간의 순서는 뛰어 넘을 수 없다며 누나인 화협옹주의 혼인날을 먼저 잡으라고 하였다.(『영조실록』 19년 2월 22일) 이에 영의정신만(申晩)의 아들인 신광수(申光綬)가 화협옹주의 부마로 결정되었으며, 신광수는 영성위에 봉해졌다.(『영조실록』 19년 4월 5일)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 화협옹주와 신광수는 혼인하였다. 이때 가뭄이 들었으므로 영조는 혼인을 미루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이 그대로 진행하되 절약하여 거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므로 이를 따랐다.(『영조실록』 19년 윤4월 28일)

1752년(영조 28) 영조는 화협옹주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밤이 깊도록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이 틀 무렵에 환궁하였다.(『영조실록』 28년 11월 25일) 그런데 이틀 후 화협옹주가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날이 밝기도 전에 옹주의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1748년(영조 24) 화협옹주의 친언니인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 상(喪)을 치룰 때 영조의 몸이 적지 않게 손상을 입었다며 가지 말기를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큰소리로 화를 내며 몸이 손상을 받은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론(黨論)때문이라면서, 옹주의 죽음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하였다.(『영조실록』 28년 11월 27일) 사도세자 또한 화협옹주의 죽음에 대해 “그 누이와의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세상을 떠나니 이 슬픔을 비유할 데가 없다”며 슬퍼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 「지(誌)」]

이후 화협옹주를 장사지내는 날에도 영조는 옹주의 집에 거둥하였다.(『영조실록』 29년 1월 23일) 그리고 화협옹주의 집에서 각전(各廛)에 외상 진 것이 많다고 하니 현목 55동(同)을 보내라고 하였다.(『영조실록』 29년 2월 22일) 영조는 화협옹주의 기일에도 옹주의 집에 가는 등 옹주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애도하였으며, 1776년(영조 52) 영조는 화협 옹주를 천장(遷葬)하는 날에 예문관(藝文館)에 제문(祭文)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영조실록』 30년 11월 27일),(『영조실록』 52년 1월 12일)

묘소 및 후손

화협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평구마을에 있다.

화협옹주는 부마 신광수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부마 신광수의 8촌 형 신광면(申光勉)의 2남 신재선(申在善)을 양자로 들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 『한중록(閑中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