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지(李純之)"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22일 (금) 01:44 판
총론
[1406년(태종 6)~1465년(세조 11) = 60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조(世祖) 때의 문신이자 천문학자.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와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 중추원(中樞院) 판사(判事) 등을 지냈다. 자는 성보(誠甫)이다. 본관은 양성(陽城)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 지사(知事)를 지낸 이맹상(李孟常)이며, 어머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유자(柳滋)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한(李澣)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춘부(李春富)이다. 조선 초기 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처음에 동궁 행수(東宮行首)를 지내다가 1427년(세종 9) 문과 친시(親試)에 을과 2등으로 급제했다.[『방목(榜目)』],(『세조실록』 11년 6월 11일) 1434년(세종 16) 사역원(司譯院) 주부(主簿)로서 갑인자(甲寅字)를 만드는 데 관여했으며, 간의대(簡儀臺) 교리(校理)로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찬집에도 참여했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세종실록』 17년 6월 8일) 이듬해 어머니 상을 당하며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세종은 얼마 후 호군(護軍)에 임명해 상중이던 이순지를 관직에 나오도록 했다(『세종실록』 18년 12월 26일),(『세종실록』 19년 4월 15일),(『세종실록』 19년 4월 20일),(『세종실록』 19년 4월 26일)
1441년(세종 23)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고득종(高得宗)과 이순지 등이 성절사(聖節使)로 북경에 갔다. 그런데 고득종이 북경(北京)에 있으면서 명(明)나라 예부 상서(尙書)호영(胡濚)에게 세종이 북쪽 오랑캐가 변경을 침략한 것을 근심하다 소갈병(消渴病)을 얻었다며 약을 얻기를 청했다. 또한 북쪽 오랑캐인 만주(滿住)가 잡아간 조선 사람들을 돌려보내줄 것도 요청했는데, 이 모든 것이 세종의 허락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세종은 고득종을 처벌하고 함께 명절사로 갔던 이순지와 김담(金淡)등도 모두 파직시켰다. 이후 이순지와 김담 등은 죄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각각 봉상시(奉常寺) 윤(尹)과 봉례랑(奉禮郞)으로 복직했다.(『세종실록』 23년 8월 13일)(『세종실록』 23년 윤11월 20일),(『세종실록』 23년 12월 15일),(『세종실록』 24년 2월 4일)
1443년(세종 25) 당시 세자였던 문종(文宗)은 이순지를 비롯해 진양대군(晋陽大君),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이승손(李承孫) 등에게 토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호조에서 양전사목(量田事目)을 세종에게 올렸다.(『세종실록』 25년 10월 25일),(『세종실록』 25년 11월 14일) 이듬해인 1444년(세종 26)에는 세종이 이순지를 불러 경상도에 저수지를 축조하는 일을 미리 시험하도록 했으며, 같은 해 1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에 제수했다.(『세종실록』 26년 8월 12일),(『세종실록』 26년 12월 23일) 1445년(세종 27) 이순지는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천문에 관련된 지식을 정리해 편찬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완성하고 그 발문을 썼다.(『세종실록』 27년 3월 30일) 그런 가운데 1447년(세종 29)에는 이순지와 이조 참판(參判)유의손(柳義孫) 등이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김유양(金有讓)의 아들 김사창(金嗣昌)의 관직을 청탁받아 그를 부사직(副司直)에 올린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사헌부에서는 이순지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자백을 받아냈고, 그 결과 이순지는 직첩을 빼앗겼다가 1449년(세종 31) 6월 돌려받았다.(『세종실록』 29년 4월 21일),(『세종실록』 31년 6월 7일)
1450년(문종 즉위년)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종마를 가지고 명나라 북경에 갔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문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돌아온 후 예조 참의(參議)를 거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문종실록』1년 1월 6일),(『문종실록』1년 1월 18일)
단종~세조 시대 활동
1452년(단종 즉위년) 예조 참판(參判), 중추원 부사(副使)에 임명되었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 직후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거쳐 이듬해인 1454년(단종 2) 호조 참판에 올랐다.(『단종실록』 즉위년 7월 2일),(『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일),(『단종실록』 1년 11월 8일),(『단종실록』 2년 8월 26일)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우의정정창손(鄭昌孫), 예조 판서(判書)박중손(朴仲孫) 등과 함께 신하들이 세자를 뵙는 절차를 논의했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세조실록』 2년 11월 26일) 1457년(세조 3) 다시 한성부윤을 거쳐 같은 해 중추원 부사에 임명되었다.(『세조실록』 3년 1월 18일),(『세조실록』 3년 9월 19일) 또한 세상을 떠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묘소를 조성하기 위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필선(左弼善)임원준(任元濬)과 함께 양주(楊洲), 과천(果川), 광주(廣州) 등에 가서 풍수지리를 살피고 묘소의 위치에 대해 의논했다.(『세조실록』 3년 9월 5일),(『세조실록』 3년 9월 6일),(『세조실록』 3년 9월 8일),(『세조실록』 3년 9월 10일),(『세조실록』 3년 9월 13일),(『세조실록』 3년 9월 16일),(『세조실록』 3년 9월 17일),(『세조실록』 3년 10월 4일),(『세조실록』 3년 10월 12일),(『세조실록』 3년 10월 13일) 그해 12월 세조의 명에 따라 이순지와 부정(副正)김석제(金石梯)는 일식과 월식의 시각 및 상황을 추산하고 예보하는 일월교식추보법(日月交食推步法)을 의논하고 정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인 1459년(세조4)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을 편찬했다.(『세조실록』 3년 12월 24일)
1458년(세조 4) 중추원 동지사(同知事)에 제수된 데 이어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를 겸직했으며, 이듬해 세자부(世子府)인 인수부(仁壽府) 윤(尹)에 올랐다.(『세조실록』 4년 3월 19일),(『세조실록』 4년 6월 28일),(『세조실록』 5년 7월 3일) 1459년(세조 5) 세조가 이순지를 불러 수양대군 시절 찬술한 『기정도보(奇正圖譜)』와 그 외편을 보여주면서, 최호원(崔灝元)과 함께 『기정도보』와 외편을 다시 찬집해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알기 쉽게 만들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에 세조가 『기정도보속편(寄正圖譜續篇)』이라는 이름을 짓고, 총 3편을 세상에 반포했다.(『세조실록』 5년 10월 7일)
1460년(세조 6)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중추원 지사(知事)에 올랐다.(『세조실록』 6년 윤11월 11일),(『세조실록』 7년 1월 20일) 1461년(세조 7)) 영의정정창손, 형조 판서박원형(朴元亨)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형전(刑典)」을 교정했다.(『세조실록』 7년 5월 9일) 이때 전라도 백성 중 섬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조정 신료들은 전라도에 토지를 측량하러 가는 이순지에게 백성들을 쇄환하는 일 또한 겸해 맡기길 요청해 세조의 수락을 받았다.(『세조실록』 7년 8월 6일) 이후 이순지는 영의정정창손, 좌의정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경복궁에 가서 동궁의 터를 살피기도 했다.(『세조실록』 7년 11월 12일)
1462년(세조 8) 세자부에 속하며 세자를 봉공하는 부서인 인순부(仁順府) 윤(尹)에 제수되었다.(『세조실록』 8년 3월 7일) 그런데 과부인 이순지의 딸이 사노(私奴)와 간통한 일이 사헌부에 알려지면서 사헌부에서 이순지의 파직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조는 정확하지 않은 일로 이순지를 파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이후 사노를 국문한 후에 간통한 사실이 밝혀지자 이순지를 파직하되 사노를 이순지에게 주어 직접 벌하게 했다.(『세조실록』 8년 4월 27일),(『세조실록』 8년 5월 1일),(『세조실록』 8년 5월 2일),(『세조실록』 8년 5월 14일),(『세조실록』 8년 5월 22일)
이순지는 1463년(세조 9) 원손이 세상을 떠나 장지를 살피게 되면서 상호군(上護軍)으로 임명되는 한편, 세조에게 지리서(地理書)를 바쳤다.(『세조실록』 9년 10월 29일),(『세조실록』 9년 11월 25일) 1454년(세조 10) 세조와 경기도 천천현(穿川峴)의 풍수지리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인 1455년(세조 11)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 10년 4월 22일),(『세조실록』 11년 6월 11일)
성품과 일화
이순지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정밀하고 교묘하며 그의 학문은 산학, 천문, 음양, 풍수 등에 두루 자세했으나 크게 일으켜 세운 부분은 없었다.
이순지가 과거에 급제한 당시 세종은 조선의 역상(歷象)이 정밀하지 못한 것을 염려해, 문신 가운데 몇몇 사람에게 산법을 익히게 했다. 이때 이순지가 “조선은 북극에 나온 땅이 38도(度) 강(强)입니다”라고 해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계산했다. 이 계산이 중국에서 들여온 역서와 일치하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며 이순지에게 천문 관측과 계산에 관련된 일을 맡겼다.(『세조실록』 11년 6월 11일)
묘소와 후손
이순지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5번지에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인 영월 신씨(寧越辛氏)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이순지의 부인은 영월 신씨는 신한(辛僴)의 딸로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부(李扶)이고, 차남은 이지(李持)이며, 삼남은 이공(李拱)이다. 사남은 이파(李把)이고, 오남은 이포(李抱)이며, 육남은 이국(李挶)이다. 1녀는 김구석(金九石)의 처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는데, 사방지(舍方知)라는 사노를 끌어다 놓고 수를 놓는다는 핑계로 10년간 밤낮을 함께 했다. 이를 알게 된 사헌부에서는 이순지가 가족을 다스리지 못했다며 파직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세조는 특별히 추국하지 말라고 하며 이순지에게 사방지를 주고 처리하게 했는데, 이순지는 다만 곤장 십여 대를 쳐서 다른 지역으로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순지의 딸이 몰래 사방지를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순지가 죽은 후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결국 의정부에서 세조에게 이 일을 아뢰니 세조는 사방지를 곤장에 처하고 신창현(新昌縣)으로 유배했다.(『세조실록』 8년 4월 27일),(『세조실록』 8년 5월 1일),(『세조실록』 8년 5월 2일),(『세조실록』 8년 5월 14일),(『세조실록』 13년 4월 5일),(『명종실록(明宗實錄)』 3년 11월 18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강릉김씨세보(江陵金氏世譜』
- 『영산영월신씨합보(靈山寧越辛氏合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