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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년(광해군 12)∼1673년(현종 14) = 54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냈다. 자는 석이(錫爾)이고, 호는 화곡(華谷)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광주(廣州), 그리고 번당(樊塘 : 시흥)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이시발(李時發)이며,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신응구(申應榘)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대건(李大建)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경윤(李憬胤)이다. 이조 판서이경휘(李慶徽)의 동생이기도 하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형제가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서필원(徐必遠)·김시진(金始振)과 절친한 사이로, 끝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기해예송(己亥禮訟)> 당시 앞장서서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적극 지지하고, 남인(南人) 윤선도(尹善道)의 3년설(三年說)을 맹렬히 배척하여, 윤선도를 귀양 보냈기 때문에 남인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 효종(孝宗)⋅현종 때 형 이경휘와 함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인조 시대 활동

1644년(인조 22)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인조실록』 22년 9월 1일),[『방목(榜目)』] 형 이경휘(李慶徽)와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나라에서 어머니에게 수연(壽宴)을 내려주었다.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바로 6품의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左郞)으로 옮겼다. 이에 비해 형 이경휘는 9품의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임명되어,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승륙(陞六)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해에 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동생 이경억이 형 이경휘보다 관직이 앞서게 되었다.

1645년(인조 23) 병조 좌랑으로 옮기고, 이후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충청도부안군수(扶安郡守)로 나가서는 정사를 간략하고 분명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처신을 청렴결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임기가 차서 3년 만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자 고을의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그를 기렸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겨울 예조 정랑으로 옮겨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가 되었는데, 그때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기 시작하자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효종실록』 1년 1월 9일) 얼마 뒤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효종에게 언로(言路)를 열도록 건의하니, 효종이 가납(嘉納)하였다.(『효종실록』 1년 윤11월 13일) 1651년(효종 2)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해 7월 제주목사(濟州牧使)김수익(金壽翼)이 정의현감(㫌義縣監)안집(安緝)과 반목하자, 효종이 이경억을 어사(御史)로 임명하여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경억이 제주도에 가서 사실을 자세히 조사한 후 임금에게 보고하자, 효종이 그의 상세한 보고에 매우 감탄하였다.(『효종실록』 2년 4월 27일) 이때부터 이경억은 효종의 신임을 받아 여러 번 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효종이 일찍이 능침(陵寢)에 배알할 때에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횃불이 꺼지는 바람에 다리가 무너져 말이 넘어지고 정병이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사헌부(司憲府) 대사헌조석윤(趙錫胤)이 파직되었으나, 병조 판서(判書)박서(朴遾)는 죄를 받지 않았다. 이에 사간원 정언이경억은 두 사람을 논핵하기를, “조석윤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고, 박서는 죄를 아전들에게 전가하였으니, 조석윤은 파직하지 말고 박서에게 죄를 물으소서.” 하였다. 이에 효종이 매우 노하여 이경억을 함경도 경성(鏡城)에 유배하였다가,(『효종실록』 2년 10월 29일),(『효종실록』 2년 10월 29일) 그 뒤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양이(量移)하였다.(『효종실록』 2년 11월 5일) 1652년(효종 3) 봄 유배에서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가을 병조 정랑에 임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였다.(『효종실록』 3년 2월 8일) 이듬해인 1653년(효종 4) 봄에 다시 병조 정랑에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병조 정랑은 군정(軍政)을 총괄하는 실무를 맡아보는 자리였다. 이어 그해 겨울 어사에 임명되자, 경상도 지방의 군정(軍政)을 안찰(按察)하였다.(『효종실록』 4년 12월 17일)

1654년(효종 5) 어사이경억이 돌아와서 효종에게 복명(復命)하니, 효종이 보고한 내용에 만족하여 다시 병조 정랑에 임명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효종실록』 5년 4월 8일) 1655년(효종 6) 가을에는 경상도추쇄어사(慶尙道推刷御史)에 임명되었으나,(『효종실록』 6년 2월 8일) 병이 심하여 도중에 돌아온 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다.(『효종실록』 6년 4월 27일) 1656년(효종 7)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기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효종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고,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사헌부 헌납(獻納)이 되었다.(『효종실록』 7년 9월 15일) 겨울에 동래부사(東萊府使)에 발탁되었으나, 병이 다시 도져 부임할 수가 없었으므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효종실록』 8년 3월 6일),(『효종실록』 8년 8월 4일) 이때 이경억은 “구례(舊禮)에는 공사(公私)의 노비(奴婢)는 아비가 양인(良人)이고 어미가 천인(賤人)이면 어미의 신분을 따르고, 어미가 양인이고 아비가 천인이면 아비의 신분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비천한 노비가 날로 불어나고 양인이 날로 줄어드니, 지금부터는 사내는 아비의 신분을 따르고 계집은 어미의 신분을 따라 고르게 되도록 하소서.” 하자, 효종이 이경억의 주장대로 따라서 종모법(從母法)을 개정하게 하였다. 이때 재상이 이를 비판하자, 효종이 이르기를, “이경억은 반드시 임금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1658년(효종 9) 겨울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효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얼마 뒤 형조 참의(參議)로 옮겼다가 1659년(효종 10) 다시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다.(『효종실록』 10년 2월 27일)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였는데, 승정원 승지이경억은 현종의 최측근으로서 새 임금을 보좌하였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되었다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현종실록』 즉위년 7월 21일),(『현종실록』 즉위년 8월 8일) 이때 효종의 승하에 따른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服制) 문제가 발생하였다.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등은 기년복(朞年服 : 1년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윤선도(尹善道)와 윤휴(尹鑴) 등은 삼년복(三年服 : 3년 상복)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사간원 대사간이었던 이경억(李慶億)은 남인 윤선도의 상소가 음흉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며 맹렬히 공격하여, 남인 윤선도를 함경도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현종실록』 1년 4월 20일) 그 결과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축출되었다. 이 사건은 기해년에 일어났으므로, 기해예송이라고 부른다. 그 뒤에 이경억은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1661년(현종 2) 공조 참의로 전직되었다.(『현종실록』 2년 4월 10일) 그리고 그때 어머니 상을 당하여 형 이경휘(李慶徽)와 함께 3년 동안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1663년(현종 4) 3년 상기(喪期)를 끝마치자,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다시 승정원 승지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1664년(현종 5)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얼마 뒤에는 이조 참의가 되어, 인사 행정을 공정하게 시행하였다. 1665년(현종 6) 사간원 대사간과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고, 마침내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현종실록』 6년 1월 3일),(『현종실록』 6년 7월 1일) 당시 자급은 아직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였는데, 이 자급으로 도승지에 임명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얼마 뒤에 호조 참의가 되어 승문원(承文院) 부제조(副提調)를 겸임하였다. 또 사간원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그해 겨울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발탁되었다. 이때 이경억이 아뢰기를, “판적(版籍)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인데, 호적(戶籍)에 관한 법이 폐기되어 인구의 실제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호적에서 누락된 자에 대한 처벌의 법을 엄격히 하소서.” 하니, 현종이 그대로 따르고, 이경억에게 명하여 그 규례를 정하도록 하였다.

1666년(현종 7) 여름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비변사(備邊司) 유사 당상(有司堂上)과 의금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형조 참판으로 옮겼으며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나갔다. 경기 관내의 6개 우역(郵驛)이 서울 근처에 집중되어 있어서 우역의 관리들이 거처할 곳이 없었으므로, 감영(監營)의 남은 재물을 출연하여 빈 터를 산 후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다. 또 곡식 1백여 석을 내어주어 곤궁한 우역의 관리들을 도와주었고, 고마법(雇馬法)을 세워 우역(郵驛)의 말들을 민간에서 빌려서 갖추게 하였으므로, 여러 우역의 관리들이 편하게 여겼다.

1667년(현종 8)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 특별히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된 후에는 의심스럽다고 지체된 옥송(獄訟)을 명확히 판결하여 지체되는 일이 없게 하였다.(『현종실록』 8년 1월 15일) 이어 다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의주(義州) 사람이 국경을 넘어 만주 땅으로 들어가서 벌목(伐木)한 일이 있었다. 청(淸)나라 사신이 와서 이를 허가한 의주부윤(義州(府尹)이시술(李時術)을 문책하여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병조 판서허적(許積)이 은밀히 현종에게 직접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하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북향한 후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였다. 이때 사헌부 대사헌이경억은 남인 출신인 병조 판서허적을 탄핵하며 죄를 주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남인 출신의 사간원 정언안숙(安塾)이 도리어 대간(臺諫)에서 발론(發論)할 때 사헌부 대사헌이경억이 중론(重論)을 마음대로 바꾸었다고 탄핵하였다.(『현종실록』 8년 3월 13일) 이런 과정에서 현종은 사간원 정언안숙을 파직시키고, 특별히 이경억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하였다.(『현종실록』 8년 3월 13일,(『현종실록』 8년 3월 22일)

1668년(현종 9)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때 장부를 정밀히 조사하고 경비를 더욱 절약하니, 쓸데없는 비용이 크게 줄었다. 가을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경연청(經筵廳)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겨울에는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현종실록』 9년 10월 27일),(『현종실록』 10년 3월 4일) 그때 전대(錢袋)를 풀어서 사신 일행의 여러 원역(員役)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신 이경억의 짐은 매우 단출하였다. 서장관(書狀官)박세당(朴世堂)이 이것을 보고 그의 청렴함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박세당은 이경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게 되었다.[『서계집(西溪集)』 권12]

1669년(현종 10) 봄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예조 판서로 옮겼다. 이때 형 이경휘가 세상을 떠나자 이경억은 형이 맡아보았던 이조 판서의 직임을 대신 맡았다.(『현종실록』 10년 7월 11일) 그러나 사간원 사간조성보(趙聖輔)가 평소에 이경휘에게 잘못 보여 출세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다가, 이때 형제의 작은 허물을 들춰내어 동생 이경억을 탄핵하였다.(『현종실록』 10년 7월 13일) 이경억이 한강 근처에 있는 번당의 집으로 돌아와서 사직하기를 간곡히 청하자, 결국 이조 판서에서 해직되고 한직인 의정부 참찬(參贊)에 임명되었다.

1670년(현종 11) 세자시강원 우빈객(右賓客)과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이때 김징(金澄)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있을 때에 그 어버이를 위해 축수연(祝壽宴)을 베풀었는데, 간관(諫官)김석주(金錫冑)가 그 잔치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고 탄핵한 일이 있었다. 이때 남인들이 모두 감정을 품고 벌떼처럼 일어나서 김징이 장물죄[贓汚]를 크게 범했다고 성토하는 바람에 김징을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조사하게 되었다. 의금부 지사이경억이 김징의 옥사를 심의하게 되었는데, 어버이에게 축수연을 베푼 것을 가지고 죄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관물(官物)을 유용하였다는 가벼운 죄를 적용하여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는 정도로 김징의 처벌을 감죄(勘罪)하였다. 이때 남인 출신의 영의정허적은 이경억이 사사로이 장리(贓吏)를 비호한다고 비방하였고,(『현종실록』 11년 5월 15일) 결국 이경억은 파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문을 받고 직첩을 빼앗겼다.(『현종실록』 11년 5월 28일) 김징 또한 결국 황해도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그해 겨울 이경억은 특명으로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671년(현종 12) 봄 예조 판서가 되어, 세자시강원 빈객(賓客)을 겸임하였다. 여러 번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세자(世子 : 숙종)를 책봉하게 되었으므로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세자를 책봉하는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다시 한강 근처에 있는 번당 집으로 돌아와서 전처럼 사직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이 심해지자, 현종은 어의(御醫)를 보내 그를 진찰하게 하였고 내국(內局)의 약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경연청 지사와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1672년(현종 13) 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직인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겼다. 여름에는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곧 우의정으로 옮겼다. 병이 심해지면서 사직을 여러 차례 간청하였으나, 현종이 허락하지 않고 한직으로 옮겨주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673년(현종 14) 여름에는 의정부 좌의정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그때 명혜공주(明惠公主)가 맹만택(孟萬澤)에게 하가(下嫁)하게 되었는데, 이미 택일(擇日)한 뒤에 공주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이 가엾게 여겨 맹만택에게 내리는 작위를 정지하지 않고 부부가 되는 혼례를 성사시키고자 하자, 좌의정이경억이 아뢰기를, “죽은 자를 성혼시키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하여, 혼례가 결국 중지되었다.(『현종실록』 14년 4월 27일) 이후 이경억의 병은 갈수록 악화되어 고질이 되었고, 그는 20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 현종이 마지못하여 허락하자 이경억은 마침내 관직을 떠날 수 있었다.

1673년(현종 14) 7월 30일 지병으로 번당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였다.(『현종실록』 14년 7월 30일) 부음이 전해지자, 현종이 몹시 슬퍼하여 3년 동안 녹봉을 계속하여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문집으로 『화곡유고(華谷遺稿)』가 남아 있다.

어사 이경억과 효종의 북벌 계획

1651년(효종 2) 이경억이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그해 4월 제주목사김수익이 정의현감안집과 반목하던 끝에 안집의 횡포를 고발하였다. 제주도는 바다 건너 외떨어진 곳이므로 그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효종은 어사 한 사람을 선발하여 그 실상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이때 정언이경억이 어사로 선임되어 어명을 받고 제주도로 건너가서 사실을 조사하게 되었다.

본래 정의현감안즙은 제주목사김수익이 거느리고 있던 군관(軍官)과 사사로운 원한이 있었다. 어느 날 목사김수익이 관아에 앉아 있는데, 현감안즙이 긴 칼을 들고 들어와서, 목사김수익에게 따지다가 욕설을 퍼부면서 달려들었다. 목사김수익이 몸을 피하였고, 이후 서계(書啓)하기를, “안집이 횡포를 부렸을 뿐만 아니라, 관곡(官穀)을 마음대로 허비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효종은 안즙을 잡아와서 국문(鞫問)하도록 명하였는데, 안즙은 공초(供招)에서 김수익을 마구 욕하고 청렴하지 못한 형적이 많다고 고발하였다. 그러자 효종은 의금부로 하여금 그 죄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다.(『효종실록』 2년 4월 27일)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안즙의 수많은 말들은 모두 김수익을 무함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므로, 비록 이것을 가지고 김수익에게 죄를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김수익이 거느린 군관은 모두 시정(市井)의 장사치들이니, 남들의 비난을 받는 일을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안즙의 죄상에 대해서는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자, 효종이 하교하기를, “탐라(耽羅) 지역은 멀리 바다 밖에 위치하여, 탐관오리가 나쁜 짓을 자행하고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안즙의 죄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김수익의 일도 매우 놀라우니, 분명히 조사하여 무겁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인하고 슬기로운 어사를 잘 골라 제주도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고, 아울러 제주도의 민폐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 이에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정언이경억을 추천하였고, 효종은 이경억을 제주안핵어사(濟州按覈御史)에 임명하였다.(『효종실록』 2년 4월 27일),(『효종실록』 2년 10월 6일)

그리고 1651년(효종 2) 10월 제주안핵어사이경억이 치계(馳啓)하기를, “전 목사김수익은 과연 정의현감안집과 서로 잘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수익이 사랑하는 애첩(愛妾)과 서울에서 데리고 간 편장(褊將)⋅비장(裨將)들의 말을 듣고, 진주(眞珠)⋅대모(玳琩)⋅앵무치(鸚鵡巵)⋅노실배(蘆實杯) 등의 물품을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긁어모으는 바람에, 백성들은 논밭을 팔아 그것을 사서 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현감안집이 망궐례(望闕禮)를 하는 날 병을 칭탁하고 참가하지 않았는데, 목사김수익이 이를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안집이 다 떨어진 모자에 더러운 옷을 입고 칼을 차고 곧바로 관부(官府)로 들어가서 뜰 가운데 선 후, 목사김수익에게 제주 물산을 강제로 긁어모으는 비리 행위를 따졌습니다. 그러다가 격분하여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달려 나오자 목사김수익이 놀라서 자리를 피하였고, 휘하 사람들이 그 칼을 빼앗자 현감안집이 이내 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초 김수익의 계문(啓聞) 중에 ‘안집이 정의현의 곡식을 원장부에서 축냈다.’고 한 것은, 날조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라며, 이 사건의 실상을 보고하였다. 이어 제주도의 고질적인 폐단을 조목별로 나열하였다.(『효종실록』 2년 10월 6일)

효종이 처음에는 목사김수익의 벼슬이 높은 까닭에 조정에서 어사를 보내더라도 그에게 휘둘려 제대로 진상 조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였는데, 어사이경억이 진상을 자세하게 보고하는 것을 듣고 가상히 여기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목사김수익도 이경억의 말대로 장물죄로 다스려서 경상도 울산(蔚山)에 유배하였다. 이경억이 조사하여 보고한 제주도의 고질적인 폐단도 비변사에서 많은 부분을 혁파하였다. 북벌(北伐) 계획을 추진하던 효종은 제주도의 개혁을 통하여 군사적 기지와 경제적 발판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경억은 제주도에 있을 때에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조사하고 기로(耆老 : 늙은 사람)들을 공회당(公會堂)에 모아 잔치를 베풀고, 조정의 덕정(德政)을 펼쳤다. 더욱이 제주도 백성들이 오래도록 임금의 사자(使者)를 보지 못하다가 어사이경억을 만나보고 모두 기뻐하며 조정의 역사(役事)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경억은 효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각 지방에 어사로 여러 차례 파견되어, 북벌 계획에 필요한 각 지방의 군사적 실태와 경제적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1653년(효종 4) 겨울에는 순안어사(巡按御使)에 임명되어, 경상도 여러 고을의 군정을 순찰하고 점검하였다. 당시 효종은 북벌 계획을 세우면서, 안으로 정사를 바로잡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이에 여러 군읍(郡邑)이 두려워하였는데, 이경억은 일을 가혹하게 추진하지 않고 법을 너그럽게 집행하면서,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 자와 법대로 시행하지 않는 자만을 다스렸다. 1654년(효종 5) 어사이경억이 돌아와서 효종에게 복명(復命)하자, 보고한 내용이 임금의 뜻에 맞았으므로,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병조 정랑은 북벌을 준비하는 실무를 맡아보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경억은 여러 번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때 병조 정랑이경억은 북벌 계획을 위하여 정부에 특별히 초청된 송시열·송준길 등과 가깝게 지내며 교유하였다.

사간원 정언을 역임할 때 이경억은 형 이경휘의 일을 논하다가 효종의 뜻을 거슬러 파직된 적이 있었다. 해가 바뀌도록 임용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가, 효종이 특별히 명하여 다시 병조 정랑에 임용되었다. 어느 날 효종이 이경억을 내전(內殿)으로 불러서 만나보았는데, 효종이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 다정하게 타이르기를, “제주도의 일을 공정하게 조사한 것을 내가 실로 가상하게 여긴다. 지난번에는 내가 너무 갑자기 화를 냈는데, 지금 화낸 잘못을 후회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힘써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 달라.” 하고 격려하였다. 병조 정랑이경억이 나가자, 효종이 대신들에게 이경억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물으니, 송준길이 대답하기를, “선조 시대 명신 이시발(李時發)입니다.” 하였다.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오랜만에 임용된 이경억을 효종이 불러 타이르고 격려하였던 것이다.

그해 여름에 효종이 북벌 계획을 위하여 구언(求言)하는 교지(敎旨)를 내리자, 이에 응하여 이경억이 상소하기를, “임금이 학문을 부지런히 닦아 마음을 바르게 가질 것이며, 인재를 널리 구하여 군무(軍務)를 다스릴 것이며, 기강을 세워서 붕당(朋黨)을 깨뜨리도록 할 것입니다.” 하고, 또 궁가(宮家)의 사치함을 경계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효종이 즉시 명하여, 공주의 집 50칸을 철거하게 하였다. 그해 겨울 효종이 이경억을 특별히 홍문관 수찬에 임명하자, 대간에서 자급을 뛰어넘어 파격적인 승진이라고 하여 반대하였으나, 효종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이경억이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마침내 수찬에 부임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이경억은 평소 몸이 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어느 날 효종이 대신에게 묻기를, “이경휘의 아우는 근래 병이 어떠한가.”라며 걱정하고, 이어 어약(御藥)을 하사한 후 이르기를, “어서 병이 나아서 대궐에 입시(入侍)하여, 나를 도우라.” 하였다. 1655년(효종 6) 가을 이경억은 경상도추쇄어사에, 1656년(효종 7)에는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각지를 염찰(廉察)하고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는 직책을 맡았다. 이렇듯 이경억이 여러 차례 어사로 나갔던 것은 북벌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군사적 현황과 경제적 실태를 파악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효종은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내외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서 온갖 수모를 겪었기 때문에 귀국하여 형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임금이 되자, 반드시 청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고자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대륙의 명(明)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북경(北京)으로 천도(遷都)하여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마침 청나라에서 <삼번(三藩)의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대만(臺灣)의 정성공(鄭成功)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때 효종이 갑자기 병이 나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현종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현종은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 내외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서 있을 때 질자관(質子館)에서 태어났다. 당시 승정원 승지였던 이경억은 아직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지 못한 현종의 최측근이 되어 새 임금을 여러 면에서 많이 보좌하였다. 그러므로 현종은 승정원 승지이경억을 누구보다도 신임하고 그 도움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나이가 어렸던 탓에 북벌의 유업을 이어받기가 어려웠다. 또 아버지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할머니 장렬왕후의 복제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제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벌어지면서, 당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편 현종이 처음에 영의정정태화(鄭太和)에게 묻기를, “이공(李公) 형제 중에 누가 더 나은가.” 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난형난제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현종이 이르기를, “선왕(先 王: 효종)께서 언제나 이경억을 칭찬하면서 ‘크게 쓸 만하다.’고 하셨다.” 하였다. 이때부터 현종의 이경억에 대한 신임과 대우가 남달랐기 때문에 벼슬이 날로 높아져서, 형 이경휘는 판서에 머물렀으나, 동생 이경억은 병으로 관직을 사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우의정·좌의정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경억은 항상 말하기를, “여러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으나, 털끝만큼도 은혜에 보답한 것이 없으니, 나는 오직 심력을 다해 충성할 뿐이다.” 하였다.

당파 싸움에 휘말린 이경억

이경억은 31세 때 대간(臺諫)이 되었는데, 젊은 이경억은 평소 신념이 확고하여, 자기주장을 굽히거나 꺾이는 바가 없었다. 1650년(효종 1)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후 효종에게 상소하기를, “언로(言路)가 열리는가, 막히는가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즉위하신 초기에는 곧은 말과 바른 논의가 날마다 많았으나, 요즈음에는 침묵하는 것이 풍조로 굳어져 중외(中外)가 잠잠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언로를 열도록 건의하니, 효종이 가납하였다. 효종은 언로가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경억의 확고한 신념에 동의하여 그의 건의를 기꺼이 받아 들였던 것이다.

1651년(효종 2)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해 7월 제주목사김수익이 정의현감안집과 반목하자, 효종이 이경억을 보내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제주 백성들을 만나는 등의 조사를 통해 이경억은 안집이 무인(武人)이지만 청렴하고 건실하다고 판단한 후 사건의 진상을 효종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남인 윤휴(尹鑴)는 『백호전서(白湖全書)』에서 “훈련부정(訓鍊副正)안집은 전에 제주도에 수령으로 있을 때에 칼을 뽑아들고 상관에게 대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있을 때에 서인 권신(權臣)들의 명령을 받들어 고(故) 참의윤선도의 해남 집에 폭력을 써서, 사채(私債)의 쌀 1백 석을 하루 사이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기한 안에 바치지 못하자, 그 집의 노복 80여 명을 가두고 함부로 형장(刑杖)을 더하여 모두가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은 가혹한 형장으로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집의 어른 아이, 남녀가 사방으로 도망쳐, 마치 난리와 도둑떼를 만난 것처럼 하였으니, 지금도 그 말을 듣는 이들은 분개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훈련부정안집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숙종(肅宗)이 아뢴 대로 하라고 대답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백호전서』 권14] 숙종 때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 남인 출신의 윤휴가 안집을 고발한 것이다. 안집은 본래 패악(悖惡)하고 사나운 인물이었으나, 젊은 시절의 이경억은 현감안집이 무인이지만 청렴하고 건실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651년(효종 2) 효종이 일찍이 능침에 배알할 때에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횃불이 꺼지는 바람에 다리가 무너져 말이 넘어지고 정병(精兵)이 다쳤다. 사헌부 대사헌조석윤이 경기관찰사유철(兪㯙)이 사전에 철저하게 점검하지 않았던 죄를 감죄(勘罪)하여 고신(告身)을 빼앗는 정도의 가벼운 죄로 처벌하니, 효종이 노하여 특별히 조석윤을 파직하였다. 당시 효종은 어가(御駕)를 호위하는 데 정병을 동원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병조 판서박서(朴遾)가 직접 어명을 받고도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그 죄를 아전들에게 돌히는 바람에 아전들이 형신(刑訊)을 받고 거의 죽게 되었다. 이때 사간원 정언이경억이 두 사람의 죄를 논핵하기를, “조석윤이 법을 가볍게 적용한 잘못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박서는 직접 하교를 받고도 죄를 아전들에게 전가하였으니, 조석윤은 파직하지 말고 박서에게 죄를 물으소서.” 하니, 효종이 매우 노하여, 직언을 한 정언이경억을 파직하였다. 정언이경억은 죄의 사정(邪正)을 분변하고 시비(是非)를 가리려고 하였으나, 효종은 왕권에 도전하는 이경억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승정원 승지들이 모두 입대(入對)하여 어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효종은 더욱 노하여 이경억을 함경도 경성에 안치하게 하고, 그가 얼마나 신속하게 유배지에 도착하였는지를 역말로 보고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경억은 태연히 귀양길에 올라, 걸음을 재촉하여 서울을 떠난 지 18일 만에 유배지 경성에 도착하였다. 그를 구원해 주는 서인의 대신과 대간이 많았으므로, 채 1개월이 못 되어 그는 강원도 홍천으로 양이 되었다. 1652년(효종 3) 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 병조 정랑에 임용되었으나, 이경억은 일부러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경억은 벼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전국을 유람하였는데, 이경억은 일찍이 말하기를, “몇 달 사이에 남쪽으로 한라산(漢拏山)에 올라가고 북쪽으로 장백산(長白山)에 올라가니, 인생을 살면서 구경하는 장관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하였다.

1667년(현종 8)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을 때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과 당파 싸움을 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의주 사람이 국경을 넘어서 만주 땅으로 들어가서 벌목한 일이 있었는데, 청나라 사신이 와서 이를 허가한 의주부윤이시술을 문책하여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또 조선의 3정승에게 모화관 아래에서 대죄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병조 판서허적이 은밀히 현종에게 직접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하기를 권하였다. 이에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가 북향한 후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 황금 2천 냥과 은화 3천 냥을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로 주면서 일이 마무리되었다. 의주부윤 또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현종이 수모를 겪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는데, 양사(兩司)에서는 합사(合辭)하여 영의정정태화(鄭太和)를 비롯한 3정승을 아울러 탄핵하였고, 현종은 3정승을 탄핵한 간관을 모두 귀양 보냈다. 대사헌이경억이 아뢰기를, “3공(三公)의 반열에 있으면서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직접 모욕을 당하게 하였으니, 3공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병조 판서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양사에서 3공을 아울러 논핵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남인 병조 판서허적을 탄핵하여 죄를 주고, 여러 간관들은 유배시키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남인 출신의 사간원 정언안숙은 도리어 대간에서 발론할 때 사헌부 대사헌이경억이 중론을 마음대로 바꾸었다고 탄핵하였다. 그러자 현종은 사간원 정언안숙을 파직시켜 내쫓고, 특별히 이경억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경억이 극력 사직하기를 청하는 바람에 마침내 체차 되었다.

1670년(현종 11) 이경억이 세자시강원 우빈객과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인 김징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어버이를 위해 축수(祝壽)한 일이 있었는데, 간관김석주가 그 잔치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고 탄핵하였다. 김징은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에 남인들을 신랄하게 탄핵하여 전후로 논핵한 자가 50여 인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남인들이 모두 감정을 품고 벌떼처럼 일어나서 김징이 장물죄를 범했다고 성토하여 김징을 체포한 후 하옥시키고 조사하였다. 그러나 김징이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지 않자, 김징을 탄핵하던 남인들은 더욱 강하게 주장하여 드디어 실상을 다시 조사하여 담당 아전들을 구속하고 갖은 방법으로 협박하여 철저히 캐물었다. 김징의 후임으로 전라도관찰사가 된 남인 출신의 오시수(吳始壽)는 서인 김징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엽전 한 닢과 삼베 한 척까지도 모아서 계산에 넣어 그 죄안(罪案)을 꾸미기도 하였다.

의금부 지사이경억이 차관(次官)으로서 김징의 옥사를 심의하게 되었는데, 남인 가운데 원망을 품은 여러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가지고 김징을 공격하여 이경억의 마음을 뒤흔들었으나, 이경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설령 김징의 일이 분수에 넘치는 점이 있더라도 어버이에게 축수연을 베푼 것을 가지고 죄를 주는 것은 이미 효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재삼 조사하였으나, 끝내 장물죄를 범한 자취도 찾아내지 못하였지 않습니까.” 하고, 드디어 관물을 유용한 가벼운 죄를 적용하여 고신을 추탈하는 정도로 감죄하였다. 이때 서인인 김징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남인 출신의 영의정허적은 이경억이 사사로이 장리(贓吏)를 비호한다고 비방하였고, 이에 이경억은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영의정허적이 또 상소를 하여 이경억이 법을 농락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로 인해 이경억은 파직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문을 받은 후 직첩을 빼앗겼다.

성품과 일화

이경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용모가 준수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단아하였고, 행동이 단정하며 진중하였다. 평소 말을 간결하게 하고 함부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관청에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큰일만을 챙기고 자질구레한 작은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지론(持論)이 공평하여, 거짓으로 남의 의견을 따르는 일이 없고, 구차스럽게 남에게 동조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특히 사정을 분변하고 시비를 가리는 데에 밝았다. 평소 신념이 확고하여, 자기 주장을 굽히거나 꺾이는 바가 없었다.

1620년(광해군 12) 9월 22일, 이경억은 광주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이경억이 태어날 때 아버지 이시발이 특이한 꿈을 꾸었다.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이름을 ‘경억(慶億)’이라고 지어주었던 것이데, 이시발은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이경억이 7세이고, 형 이경휘가 10세 때, 아버지 이시발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고령 신씨가 어린 두 아들을 밤낮으로 보살피며 몸소 글을 가르쳤는데, 매우 엄격하게 교육하였다. 이경억 형제는 모두 재주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여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다. 특히 이경억은 재주가 출중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수재였다. 이경억은 나이 25세 때 정시(庭試)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그보다 한 달 뒤에 형 이경휘는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조 판서가 되어 인사 행정을 맡았을 때에 청탁을 물리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발탁하고 인사 적체를 해소하며, 지방관을 신중히 선택하였다. 또 재주와 덕행이 있는 사람을 발굴하여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 능력을 헤아려 사람을 등용하니, 사로(仕路)가 맑아졌다. 벗을 사귈 때에는 신의를 중시하였으므로, 남들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 따르지 않았다. 젊어서 서필원, 김시진과 사이가 좋았는데, 두 사람이 잘못하여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비방이 분분하였으므로, 평소 사귀던 친구들이 멀리 하거나 단교(斷交)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오직 이경억·이경휘 형제만은 처음처럼 두 사람과 변함없이 서로 교유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이경억·이경휘 형제는 어머니를 섬기는 데에 효성이 극진하였다. 형제가 이미 지위가 높아져서 몹시 바쁜 중에도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셨고, 공사(公事)와 빈객(賓客)이 아니면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다정하게 굴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갓난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이경억·이경휘 형제는 밤이나 낮이나 허리띠를 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물과 음식을 반드시 몸소 받들고 간호하였다. 어머니 상(喪)을 당해서 예법을 준수하여 잠잘 때도 상복[衰絰]을 벗지 않았다. 이경억·이경휘는 형제의 사랑이 독실하여, 오랫동안 한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것을 함께 하였고, 무슨 일을 할 때나 나들이할 때에도 서로 더불어 다정한 친구처럼 도와주었다. 형 이경휘가 동생 이경억보다 4년 먼저 죽었는데, 동생 이경억은 한가하게 있을 때나 밤에 홀로 있을 때에 못내 슬퍼하고 형을 그리워하였다. 그때 녹봉과 하사품을 받으면, 반드시 형의 집에 나누어 주고, 여러 조카들을 자식처럼 어루만져 다독이니, 여러 조카들도 숙부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이경억은 집안이 청빈(淸貧)하여 남들처럼 대문을 열고 뇌물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대개 집 밖에서는 충성스럽고 강직한 태도가 드러났고, 집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만년에 이경억·이경휘 형제가 번갈아 이조 판서가 되어, 인사 행정을 맡게 되자, 항상 권세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한강 근처에 있는 번당(樊塘 : 시흥 금천현 번당리)에 집을 짓고 퇴직한 다음에 채마밭을 가꾸고 조용하게 지낼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은퇴하지 못하는 바람에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경억은 병이 위독해지자 광주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정침(正寢)에서 임종하고자 하였으나, 병이 심해지는 바람에 한강 근처에 있는 번당의 집에서 운명하였다. 죽을 때 자식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 것과 신도비를 세우지 말 것, 그리고 장례와 제사를 사치스럽게 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일찍이 어떤 친구가 남구만(南九萬)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오직 정성스럽게 하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니, 이경억이 말하기를, “오직 담박해야만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다. 또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무릇 사람이 작록(爵祿)에 대한 태도는, 그 오는 것에 대해서도 무심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 가는 것에 대해서도 무심해야 한다.” 하였는데, 이 두 가지 말이 바로 이경억의 생애를 나타내는 명언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묘소는 충청도 청안군(淸安郡) 모산(茅山)의 언덕에 있는데, 박세당이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 있다. 1673년(현종 14) 11월에 임시로 충청도 진천군(鎭川郡) 초장리의 선영(先塋)에 부장하였다가 10년 뒤인 1684년(숙종 10) 5월에 청안군 모산의 언덕에 천장(遷葬)하였다. 이 때 호조에서 필요한 물품을 모두 보내주었다.

한편 오늘날 이경억의 간찰(簡札 : 편지)이 많이 남아 있는데, 경주 이씨 후손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 모두 16점이고, 성균관대학교와 순천대학교의 도서관에서 각각 1점씩 소장하고 있다.

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사헌부 감찰(監察)윤원지(元尹之)의 딸인데, 부덕(婦德)이 훌륭하고 자손이 매우 많았다. 자녀는 모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인소(李寅熽)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고, 차남 이인병(李寅炳)은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와 참의를 지냈으며, 3남 이인엽(李寅燁)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다. 장녀는 좌의정최석정(崔錫鼎)에게, 차녀는 현감홍만적(洪萬迪)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 이서곤(李瑞坤)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지냈으며, 증손자 이석표(李錫杓)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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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종실록(孝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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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곡유고(華谷遺稿)』
  • 『서계집(西溪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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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문선(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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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곡집(明谷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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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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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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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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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재집(性齋集)』
  • 『성옹유고(醒翁遺稿)』
  • 『죽유시집(竹牖詩集)』
  • 『청천당집(聽天堂集)』
  • 『설해유고(雪海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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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암집(歸巖集)』
  • 『만옹집(晩翁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