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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4 판
총론
[1391년(공양왕 3)∼1473년(성종 4) = 83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문신. 형조 판서(判書)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지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때 사재시(司宰寺) 판사(判事)를 지낸 이공진(李公晉)이고,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고려 좌우위(左右衛) 보승별장(保勝別將)정광조(鄭光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현(李玄)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윤번(李允蕃)이다.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의 5대조이기도 하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대명(對明)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세종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방목(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1423년(세종 5) 승문원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5년 5월 27일)
이후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가,(『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1427년(세종 9) 사역원(司譯院) 판관(判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과 출신이었으나, 중국어 배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또한 배우는 자체를 즐겨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므로, 사역원의 학생들이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였다.(『세종실록』 11년 9월 6일) 이때부터 그는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반드시 승문원과 사역원 두 원(院)의 벼슬을 겸임하였다. 이해 겨울에 전농시(典農寺)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이때 부친 상(喪)을 당하였다.(『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그러나 그를 사역원의 역학 훈도(譯學訓導)로 삼기 위하여, 1429년(세종 11) 기복(起復)시켜 호군(護軍)에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1년 9월 6일) 이후 봉상시(奉常寺) 윤(尹)으로 전임되었는데, 1435년(세종 17) 가을 모친상을 당하였다. 당시 문관 출신으로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그와 김하(金何)뿐이었으므로 그는 대명외교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세종실록』 21년 9월 10일) 그러므로 어머니의 3년 상을 치르도록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1436년(세종 18) 또 다시 그를 기복시켜 대호군(大護軍)에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8년 3월 21일),(『세종실록』 18년 3월 26일)
1438년(세종 20)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1440년(세종 22) 사간원(司諫院)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1441년(세종 23) 호조 참의(參議)를 거쳐 공조 참의로 전임되었다.(『세종실록』 23년 2월 17일),(『세종실록』 23년 9월 17일) 1442년(세종 24)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로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파견되었는데, 돌아온 후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24년 5월 4일),(『세종실록』 24년 5월 9일),(『세종실록』 24년 8월 12일),(『세종실록』 24년 10월 27일) 1447년(세종 29)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중추원 부사(副使)가 되었다. 1448년(세종 30)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이조 참판(參判)으로 승진하면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세종실록』 30년 4월 7일),(『세종실록』 30년 9월 1일) 1449년(세종 31) 명나라에서 돌아와 형조 참판을 거쳐 예조 참판이 되었다.(『세종실록』 30년 12월 27일),(『세종실록』 31년 2월 1일),(『세종실록』 31년 5월 22일)
문종~성종 시대 활동
1451년(문종 1)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정조사(正朝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문종실록』 1년 5월 4일),(『문종실록』 1년 10월 11일) 이듬해인 1452년(문종 2) 북경에서 돌아와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문종실록』 2년 2월 20일)
단종(端宗)이 왕위에 오른 후, 1453년(단종 1)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품되었고, 경창부(慶昌府) 윤(尹)이 되었다.(『단종실록』 1년 6월 8일) 이어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으며,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1455년(세조 1) 공조 판서(判書)에 임명 되었고,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456년(세조 2)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세조실록』 1년 윤6월 23일),(『세조실록』 1년 12월 27일),(『세조실록』 2년 11월 25일) 1458년(세조 4) 다시 공조 판서로 전임되었다가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60년(세조 6)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으며, 중추원 판사(判事)가 되었다.(『세조실록』 4년 10월 12일),(『세조실록』 6년 윤11월 11일),(『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이때 그는 나이가 들었으므로 서반(西班)의 한직(閒職)에 머물렀으나, 명나라 사신이 오면 어전통사(御前通事)로 활약하거나, 명나라에 주문(奏聞)할 중요한 문서를 초안할 경우에는 승문원 제조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1467년(세조 13)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468년(세조 14)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세조실록』 13년 1월 24일),(『세조실록』 14년 8월 13일),(『세조실록』 14년 8월 13일)
그런 가운데 1472년(성종 3)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473년(성종 4) 10월 9일 노병으로 서울 근교 금천(衿川)의 본가에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성종실록』 3년 3월 10일),(『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저서로 『훈세평화(訓世評話)』가 남아있다.(『성종실록』 4년 6월 13일)
성품과 일화
이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엄격하고 정직하여, ‘뼈대 있는 신하[硬骨之臣]’라고 자처할 만큼 강직하였다. 남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항상 겉과 속이 같았다. 남의 과실을 보면 바로 면전에서 꾸짖었고, 아무리 윗사람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았다.(『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이변이 이조 참의(參議)였을 때, 이조의 당상관(堂上官)들이 모여 임금에게 후보자를 천거하는 3망(望 : 후보자)을 할 때면 그는 반드시 먼저 큰 소리로 “참의도 역시 이조의 당상관인데, 사람을 잘못 쓰게 되면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인사를 논의하는 것을 꺼리거나 피하지 않았다.(『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그러므로 인사를 전형[銓注]할 때마다 윗사람인 이조 판서와 이조 참판이 추천하는 후보자를 많이 비판하였다. 하루는 외관(外官)이 이변에게 인사를 청탁하려고 신선한 생선과 좋은 고기를 선물하자, 그는 이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조 판서가 이미 그 선물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인사 행정이 끝난 뒤에 이조 판서가 좋은 고기를 이조 당상관들에게 대접하자, 그는 젓가락을 들고 빈정거리며, “이것이 바로 꿱꿱거리는 거위의 고기입니까.” 하고, 이조 판서가 거위처럼 소리를 지르며 거만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비꼬았는데, 이때 이조 판서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속으로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이변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생 남을 속이지 않았다. 조정에 들어와서 벼슬살이를 한 이래, 한 번도 거짓으로 병이 났다고 핑계대고 출근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이 말을 듣고 “참으로 그렇다면 상공(相公 : 재상 이변을 일컫는 말)의 덕은 진실로 독경(篤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 들어가 벼슬살이 한 옛 사람들 가운데에는 처신하기가 어려울 때 임금에게 병이 났다고 핑계대고 결근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말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고 하였다. 이변의 이런 말은 아마도 그가 세종 시대 때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었다는 말인 것 같다. 왜냐하면 세종은 훌륭한 임금이라 이변이 처신하기 어려울 때가 한 번도 없었겠지만, 세조 때처럼 신하들이 처신하기가 어려웠던 시기에는 병을 핑계로 결근한 적이 없었다는 말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고 김종직이 비판한 것 같기 때문이다.
이변은 중국어를 공부할 때에는 집안사람들에게 중국어만 사용하였고, 친구와 만날 때에도 중국어로 인사하고 대화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중국어[漢語]와 이문(吏文)을 잘하였기 때문에 항상 승문원과 사역원의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는데, 매일 승문원과 사역원 두 관사에 출사(出仕)하여 후배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항상 어전에서 중국어를 통역하는 일을 맡았는데, 임금의 뜻에 맞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항상 임금에게 대우를 받았다. 이변은 여러 번 중국에 사신으로 갔기 때문에 명나라 사람들이 모두 다 이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됨이 편협하고 성급하여 동료들과 조금이라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면전에서 꾸짖기도 하였다고 전한다.(『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묘소와 후손
시호(諡號)는 정정(貞靖)이니, 안팎으로 정(情)을 쏟는 것이 ‘정(貞)’이고, 부드럽고 곧으며 편하게 천명(天命)을 마치는 것이 ‘정(靖)’이다.(『성종실록』 4년 10월 10일) 묘소는 서울 부근 금천현(衿川縣 : 현재 서울시 시흥동)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0] 이단하(李端夏)가 지은 「이변전기(李邊傳記)」가 남아있다.[『외재집(畏齋集)』 권11]
부인 이씨(李氏)는 순찰사(巡察使)이거흥(李巨興)의 딸인데, 자식은 2남을 두었다. 장남 이효조(李孝祖)는 봉례(奉禮)·직장(直長)을 지냈고, 차남 이효종(李孝宗)은 통판(通判)·황주판관(黃州判官)을 지냈다. 5대손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큰 역할을 하였던 충무공(忠武公)이순신이다.
1473년(성종 4) 이변이 승문원 제조와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우리나라의 명현(名賢)과 절부(節婦)의 행적을 『훈세평화』라는 책으로 엮어서 중국어로 번역하여, 승문원과 사역원 두 기관의 관리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후손 이단하는 「이변전기」에서 “일찍이 『훈세평화』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책을 약탈해 가는 바람에 최근 일본 나고야시[名古屋市]에 있는 도쿠가와 집안[德川家]의 ‘봉좌문고(蓬左文庫)’에서 이 책이 발견되었다. 국내에는 영인본이 출간되었는데, 이변의 『훈세평화』는 15세기 한국어와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외재집(畏齋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선고(淸選考)』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사가집(四佳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 『잠곡유고(潛谷遺稿)』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강집(秋江集)』
- 『택당집(澤堂集)』
- 『필원잡기(筆苑雜記)』
- 『표해록(漂海錄)』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