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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4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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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희빈홍씨 |
한글표제 | 희빈홍씨 |
한자표제 | 熙嬪洪氏 |
분야 | 왕족/후궁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선조 |
집필자 | 홍연주 |
봉작 | 희빈(熙嬪)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출생 | 1494년(성종 25) 4월 14일 |
사망 | 1581년(선조 14) 11월 6일 |
본관 | 남양(南陽)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 산119 |
증조부 | 홍정(洪淀) |
조부 | 홍임(洪任) |
부 | 홍경주(洪景舟) |
모_외조 | 안동 권씨(安東權氏) : 권금성(權金成)의 딸 |
형제 | (오라버니)홍우룡(洪遇龍) (언니)김명윤(金明胤)의 처 |
처_장인 | (남편)중종(中宗) →(자녀)2남 |
자녀 | (1자)금원군(錦原君) 이영(李岭) (2자)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희빈홍씨(熙嬪洪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년 9월 2일, 『중종실록』 1년 9월 8일, 『중종실록』 39년 5월 29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7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14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16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18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15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20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명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명종실록』 2년 윤9월 16일 |
총론
[1494년(성종 25)~1581년(선조 14) = 88세].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中宗)의 후궁.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를 지낸 홍경주(洪景舟)이고,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정인지(鄭麟趾)의 사위인 건공장군(建功將軍) 권금성(權金成)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암군수(靈巖郡守)를 지낸 홍임(洪任)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홍정(洪淀)이다.
중종의 후궁
홍희빈(洪熙嬪)의 아버지인 홍경주는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으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2일),(『중종실록』 1년 9월 8일) 이후 정국공신들의 신분 보장을 위한 정략적인 뜻에 따라 홍희빈은 중종의 후궁으로 입궐하였다. 처음에는 숙의(淑儀)가 되었고, 소의(昭儀)·귀인(貴人)을 거쳐 정1품 빈까지 올랐다.
1527년(중종 22) 세자(훗날의 인종)를 저주한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아들이 있는 후궁들을 모두 의심하였다. 이때 정현왕후(貞顯王后)는 “홍씨는 충실하고 순한 사람이라. 내 반드시 혐의가 없음을 보증하리라”며 힘써 변명하였고, 이에 홍희빈은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종의 총애를 받은 홍희빈은 아버지의 권세를 뒷받침하며 궁중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사건까지도 탐사하여 아버지에게 알림으로써 사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특히 훈구파(勳舊派)인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새로이 정계에 등장하여 혁신정책을 주장하던 사림파(士林派) 제거에 앞장섰다. 훈구파는 1519년(중종 14) 당시 사림(士林)의 영수였던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그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꿀로 써서 벌레가 먹게 하는 일을 꾸몄는데, 이 일에 홍희빈이 가담하였다. 홍희빈은 당시 “온 나라 인심이 모두 조씨(趙氏)에게로 돌아갔다.” 라고 중종에게 고하며 ‘주초위왕’이 새겨진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여 중종의 마음을 흔들었다.(『중종실록』 39년 5월 29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7 「중종조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仁宗)이 병사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은 정권의 기반을 굳히고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고, 종친 중에서 명망이 있던 홍희빈의 둘째 아들 봉성군(鳳城君)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임백령(林百齡)은 때마침 하옥된 이덕응(李德應)을 위협하여 봉성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역모를 꾀하였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9월 6월 9번째기사],(『명종실록』 즉위년 9월 7일),(『명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이 일로 인하여 홍희빈과 봉성군은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명종실록』 즉위년 9월 14일),(『명종실록』 즉위년 9월 16일),(『명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명종실록』 즉위년 9월 18일),(『명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 명종은 그녀가 선왕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이자 대왕대비에게도 신임을 얻었던 점을 들며 홍희빈을 처벌하지 않았다.(『명종실록』 즉위년 9월 15일),(『명종실록』 즉위년 9월 20일),(『명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그러나 이 일이 문제가 되어 홍희빈은 결국 같은 해 9월 21일 사가로 돌아갔다. 당시 사관들은 그녀가 어머니의 병환을 이유로 사가로 돌아가는 것은 핑계일 뿐이며, 실제로는 당시의 일에 대하여 스스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이후 1581년(선조 14) 11월 6일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후손
홍희빈의 무덤은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 산119번지에 위치해 있다.
홍희빈은 중종과의 사이에서 5남을 두었으나 3남은 일찍 죽었고 2남만이 봉작을 받았다. 첫 번째 아들은 금원군(錦原君)이영(李岭)으로 도사(都事)정승휴(鄭承休)의 딸과 혼인하였다. 2남 봉성군이완(李岏)은 정랑(正郞)정유인(鄭惟仁)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547년(명종 2)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명종실록』 2년 윤9월 16일)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희빈홍씨묘지명(熙嬪洪氏墓誌銘)』
- 『이암유고(頤菴遺稿)』
- 김돈, 「중종 대 ‘작서의 변’과 정치적 음모의 성격」, 『한국사연구』119, 2002.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지두환, 『중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