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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3 판
총론
[?~1651년(효종 2) = ?].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仁祖)의 후궁. 본관은 순창(淳昌)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지낸 조기(趙琦)이며, 어머니는 조기의 첩인 한옥(漢玉)이다. 할아버지는 병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조천상(趙天祥)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조효정(趙孝貞)이다.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은 1630년(인조 8) 여시(女侍)로 궁에 들어왔는데, 정식의 예선(禮選)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닌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왔다 하여 행 부호군(行副護軍)이명준(李命俊)의 탄핵을 받았다. 이명준의 당시 탄핵안을 보면, 조귀인이 정백창(鄭百昌)이라는 자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왔고 이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인조실록』 8년 7월 2일) 궁에 들어와 숙원(淑媛)의 첩지를 받아 인조의 후궁이 된 조귀인은 왕의 총애를 받았다. 1638년(인조 16) 소원(昭媛), 1640(인조 18) 소용(昭容), 1645년(인조 23) 소의(昭儀)를 거쳐 1649년(인조 27) 종1품 귀인에까지 올랐다.(『인조실록』 16년 12월 21일),(『인조실록』 18년 8월 27일),(『인조실록』 23년 10월 2일),(『인조실록』 27년 2월 11일)
한편 조귀인은 인조의 장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비인 강빈(康嬪)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인조실록』 23년 6월 27일),(『인조실록』 23년 7월 22일) 특히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점점 참소와 이간질이 심해졌는데 강빈의 동생이었던 강문성(姜文星)이 귀양을 가자 세간의 사람들이 모두 강씨에게 화가 미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한다.(『인조실록』 23년 10월 2일) 결국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 1월 어선(御膳)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의 주모자로 강빈을 의심하여 강빈 처소의 나인들이 잡혀가 심문을 당하였다.(『인조실록』 24년 1월 3일 4번째기사) 강빈 역시 2개월 후 사사(賜死)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모두 사건의 전모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고 단지 추측으로만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이를 수긍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일은 조귀인에게 그 죄를 물었다.(『인조실록』 24년 3월 15일)
이 외에도 조귀인은 인조와 장렬왕후(莊烈王后)를 이간질하여 장렬왕후를 이궁(異宮)인 경덕궁(慶德宮)으로 내보내는 등 인조 연간 내내 위세를 떨쳤다.(『인조실록』 23년 10월 9일)
효종 대 폐서인
1649년(효종 즉위년) 인조가 사망한 후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과 정치노선이 달랐던 김자점(金自點)이 효종을 청(淸)나라에 밀고했다가 광양현(光陽縣)에 유배되는 일이 벌어졌다.(『효종실록』 즉위년 6월 22일) 사실 인조가 강빈에게 사약을 내릴 때 대신들은 사건이 애매하다며 사사(賜死)를 반대하였으나, 김자점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강빈이 사사된 후 김자점은 곧 영의정이 되었다. 이렇듯 소현세자가 죽은 후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있을지도 모를 잠재적 불안을 없애는데 조귀인과 김자점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도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이 자신들과의 관계에 거리를 두자 조귀인과 김자점은 매우 서운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들의 입지마저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김자점은 자신의 아들 김련(金鍊), 김식(金鉽) 및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였던 김세룡 등과 역모를 꾀하여 조귀인의 장자인 숭선군(崇善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효종실록』 2년 12월 13일),(『효종실록』 2년 12월 17일) 그런데 1651년(효종 2) 11월 조귀인이 장렬왕후를 저주한 <궁중 저주 사건> 저주사건이 발각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사건은 조귀인이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여종인 영이(英伊)를 숭선군의 첩으로 삼으려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숭선군의 부인이 자신의 이모인 장렬왕후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장렬왕후가 영이를 불러 이를 꾸짖자, 당황한 영이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다가 조귀인이 장렬왕후를 원망하며 무당 등과 수상한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장렬왕후가 이것을 효종에게 알렸고, 효종은 영이와 영이가 언급한 무당 등을 국문하였다.(『효종실록』 2년 11월 23일),(『효종실록』 2년 12월 13일),(『효종실록』 2년 12월 14일)
이때 김자점의 반역 사실도 드러났다. 그 해 12월 이영(李暎)과 신호(申壕)가 자신들의 장인이자 조귀인의 종형(從兄)인 조인필(趙仁弼)이 김자점과 서로 내통하였으며, 반역의 정상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효종실록』 2년 12월 7일) 이미 궁중 저주 사건과 관련하여 조귀인의 종형인 조인필에 대한 국문을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이에 겁을 먹은 이영과 신호가 이들의 음모를 먼저 밝힌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 저주 사건과 반역 사건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건의 중요성은 커졌고, 모든 대신들이 국청(鞫廳)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효명옹주의 몸종인 업이(業伊)는 효명옹주가 옷소매 속에다 사람의 뼛가루를 담아서 대내(大內) 및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집에 뿌렸고, 그 외에 다른 더럽고 흉한 물건도 많이 묻었다고 진술하였다.(『효종실록』 2년 11월 23일) 더욱이 이에 그치지 않고, 효명옹주가 임금을 없애고 낙성위김세룡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는 진술까지 하였다.(『효종실록』 3년 3월 4일)
이 일로 인하여 대신들은 조귀인에 대한 작호 삭탈과 엄한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효종은 번번이 거절하였다.(『효종실록』 2년 11월 27일),(『효종실록』 2년 11월 27일),[『효종실록』효종 2년 12월 1일 3번째기사],[『효종실록』효종 2년 12월 2일 2번째기사] 그러다 결국 효종은 조귀인의 딸인 효명옹주(孝明翁主)에게는 별다른 죄를 묻지 않고 조귀인에게는 자결할 것을 명하고, 효명옹주의 부마인 김세룡은 사형에 처하였다.(『효종실록』 2년 12월 14일),(『효종실록』 2년 12월 16일) 이렇게 조귀인은 사사(賜死)되었으나 그녀가 인조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임을 감안하여 작호는 폐하지 않고 장례 또한 귀인에 맞게 치러졌다.(『효종실록』 2년 12월 14일)
묘소와 후손
조귀인의 무덤은 현재 알 수 없다.
조귀인은 인조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숭선군이징(李澂)으로 신익전(申翊全)의 딸과 혼인하였다.(『인조실록』 26년 4월 20일)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역모와 연루되어 이듬해인 1652년(효종 3) 1월 강화도에 유배를 가서 위리안치에 처해졌다.[『승정원일기』효종 3년 1월 4일] 2남은 낙선군(樂善君)이숙(李潚)으로 김득원(金得元)의 딸과 혼인하였다. 형인 숭선군이 강화도에 유배 갈 때 함께 가서 지냈는데(『효종실록』 3년 1월 3일), 효종은 이들에게 옷을 하사하기도 하고, 병이 들면 내의를 보내기도 하며 이복동생들을 챙겼다.(『효종실록』 3년 8월 8일),(『효종실록』 5년 2월 1일),(『효종실록』 5년 2월 17일),(『효종실록』 5년 2월 19일),(『효종실록』 5년 5월 24일),(『효종실록』 6년 5월 22일) 결국 효종은 1656년(효종 7) 숭선군과 낙선군을 유배에서 풀어주었고,(『효종실록』 7년 윤5월 14일),[『효종실록』효종대왕행장] 유배를 가며 선원록에서 삭제되었던 작호를 다시 회복시켜주고자 하였다.(『효종실록』 3년 1월 15일),(『효종실록』 7년 6월 20일),[『승정원일기』효종 7년 6월 21일] 이에 대한 대신들의 반대가 거셌으나,(『효종실록』 7년 8월 4일) 결국 1659년(효종 10) 이들 형제의 관작이 회복되었다.(『효종실록』 10년 1월 16일)
1녀는 효명옹주로 김자점의 손자 낙성위(洛城尉)김세룡과 혼인하였다.(『인조실록』 25년 8월 16일) 인조와 조귀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혼인 후에도 2년간 궁에서 생활을 하다 출궁하였다.(『인조실록』 27년 4월 19일) 인조가 사망한 후 어머니 조귀인이 벌인 저주 사건에 효명옹주가 가담하였다는 증언이 나오고, 김자점의 역모에 남편 김세룡이 연루되며 김세룡이 사형에 처해지자 효명옹주는 통천군(通川郡)으로 유배를 가는 것과 동시에 관작이 삭탈되어 김세룡의 처로 불렸다.(『효종실록』 2년 12월 16일),(『효종실록』 2년 12월 21일) 그러나 이듬해인 1652년(효종 3) 통천의 날씨가 너무 춥다는 이유로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며,(『효종실록』 3년 9월 12일) 1655년(효종 6)에는 효종의 배려로 숭선군과 낙선군이 유배생활을 하던 강화도에 가서 함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효종실록』 6년 10월 18일) 이후 1658년(효종 9) 석방되었으나 내관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효종실록』 8년 6월 13일),(『효종실록』 9년 6월 29일)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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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흠, 「조선 후기 역모 사건과 변통론의 위상 - 김자점 역모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70, 2006.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계보』, 지식하우스, 2008.
- 신명호,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 이미선, 「조선시대 후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이순자, 『조선의 숨겨진 궁가 이야기』, 평단, 2011.
- 지두환, 『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