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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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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해동유선록 |
한글표제 | 해동유선록 |
한자표제 | 海東儒先錄 |
분야 | 사적기 |
유형 | 한문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김수항 |
권책수 | 4책 |
소장처 |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해동유선록(海東儒先錄) |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조선성종 때부터 인조 때까지 활약한 명현들의 사적과 언행 등을 발췌하여 편찬한 책.
개설
『해동유선록(海東儒先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조선성종 때부터 인조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명현들의 사적과 언행 등을 발췌해 편찬한 책이다.
저자 김수항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정치인으로 당파는 서인이다. 서인당과 노론당의 중진이었고, 예송 논쟁 당시 서인의 주요 논객이었으며, 송시열의 주자가례에 의한 1년 복설을 지지하였다. 서인으로서 2차례의 예송 때 남인과 대립했으며,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반시와 진사시에 입격하고, 1651년에 알성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1654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쳐 1656년(효종 7)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다섯 번 과거에 급제했다. 대사간, 형조참의 등을 거쳐, 1659년 이조참의, 승지 등을 두루 역임했다. 1661년(현종 2) 이조참판 등을 거쳐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 때 3년복설[1] 을 주장하는 윤휴, 윤선도, 허목, 허적 등에 맞서 송시열, 송준길의 1년복설을 지지하였다. 그 뒤 송시열을 역모로 몰려는 윤선도를 탄핵하여 유배를 보내고, 1662년 대제학(大提學)에 특진하였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부음으로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형 김수흥(金壽興),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복(大功服, 9개월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공세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숙종 즉위 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윤ㆍ허적ㆍ허목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그러나 다시 영암에 부처되었다가 석방, 1680년 영의정이 되고, 1681년 현종실록의 편찬총재관을 지냈다.
서인의 중진이었다가 1682년 김익훈의 처벌을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 그는 노론을 선택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전남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위리안치가 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서지 사항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25.2cm 가로 16.0cm이며,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저자가 젊었을 적에 쓴 자필본으로, 권별로 수록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권1에 김굉필(金宏弼)ㆍ서경덕(徐敬德)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 권2에 김안국(金安國)ㆍ정붕(鄭鵬)ㆍ김정(金淨)ㆍ김정국(金正國), 권3에 이언적(李彦迪)ㆍ성수침(成守琛)ㆍ이황(李滉), 권4에 송인수(宋麟壽)ㆍ성운(成運)ㆍ유항(柳恒)ㆍ조식(曺植)ㆍ성제원(成悌元)ㆍ김인후(金麟厚)ㆍ이중호(李仲虎)ㆍ홍인우(洪仁祐)ㆍ민순(閔純)ㆍ서기(徐起) 등 모두 22인을 선별, 수록하였다.
체재는 대부분 이들의 문집의 행장ㆍ신도비명ㆍ묘갈명ㆍ가장 중에서 1, 2편씩 발췌해 싣고,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이정(李楨)의 『경현록(景賢錄)』,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를 포함한 40여 종의 문헌에서 그들의 언행에 관한 기록을 단편적으로 채집한 유사(遺事) 등을 수록하였다.
또 수록된 글의 저자 및 인용한 문헌의 출전 등을 명시하였다. 예를 들면, 정여창의 기록에 중국의 사신 장녕(張寧)이 그의 이름을 해설한 ‘명설(名說)’과 1492년(성종 23) 조효동(趙孝仝)이 그를 천거하면서, 올린 ‘천학행소(薦學行疏)’ 등을 수록하는 등 특색을 갖추고 있다.
한편 이 책은 남공철(南公轍)이 1822년(순조 22)에 편찬한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이나 이존중(李存中)의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등보다는 내용면에서 빈약하지만, 시기적으로는 이들 두 책과 김육(金堉)이 만년에 편찬한 『국조명신록』의 이본(異本)보다 앞서 편찬된 것으로, 서지적으로 참고가 된다.
또한 1570년(선조 3) 유희춘(柳希春)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보다 많은 인물들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 박명희, 「김수항의 구림생활과 시문학」, 『구림연구』, 경인문화사, 2003.
- 박명희, 「문곡 김수항의 시문에 구현된 영암 유배지에서의 생활」,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 제43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08.
- 유영봉,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시문(詩文)에 깃든 가족사(家族史)[1]」, 『한문학보』 29권, 우리한문학회, 2013.
- 이해준, 「진도 유배인물지」, 『진도군의 문화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