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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1 기준 최신판



1478년(성종 9)에 서거정(徐居正, 1422~1492)이 처음으로 엮은 시문집

개설

『동문선(東文選)』은 1478년(성종 9)에 서거정(徐居正, 1422~1492)이 처음 엮은 시문집이다. 중국 양(梁)의 소통(瀟統: 501~531)이 진(秦)ㆍ한(漢) 이후 제(齊)ㆍ양(梁)대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문선(文選)』을 본떠 만들었다. 본문 130권 42책과 목록 3책을 합해서, 모두 133권 45책이다. 뒤에 나온 『동문선』과 구별하여, 『정편동문선(正編東文選)』이라고도 한다. 사(辭)ㆍ부(賦)ㆍ시(詩)ㆍ문(文) 등 여러 종류의 작품 4,300여 편이 실려 있다.

1518년(중종 13)에는 신용개(申用漑:1463~1519) 등에 의해서, 『속동문선(續東文選)』이 다시 편찬되었다. 본문 21권 10책과 목록 1책을 합한 23권 11책에 약 1,300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강한 유교사상이 엿보인다. 세번째에는 1713년(숙종 39) 송상기(宋相琦:1657~1722) 등에 의해 개편되었다. 이것은 청(淸)의 강희제(康熙帝)가 우리나라의 시문을 보고 싶다고 하여 만든 것이다. 이 책은 『동문선』이라고 했으나,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신찬동문선(新纂東文選)』이라고도 부른다. 본문 33권 14책, 목록 1책을 합해서 35권 15책에 약 1,200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편찬/발간 경위

『동문선』은 조선시대 성종의 왕명으로 신라시대에서 조선숙종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역대 시와 문장들을 엮어서 모은 책으로 성종 9년인 1478년에 간행됐다. 서거정(徐居正)을 중심으로 당시의 대학자였던 노사신ㆍ강희맹 등을 포함한 23명이 참여해서 이루어진 책을 정편이라고 한다. 정편에는 약 500명에 이르는 작가들의 작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대제학이던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제시해서, ‘사리(詞理)가 순정(醇正)하고, 치교(治敎)에 도움 되는 것’을 선택하였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시문이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극성해졌다고 보고, 역대의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글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 후의 시문을 모아서, 중종 때 신용개(申用漑)가 속편을 펴냈고, 숙종 때 송상기(宋相琦) 가 다시 개편하였다.

서지 사항

130권 46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4.2cm, 가로 22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구성을 보면, 권1∼3은 사(辭)ㆍ부(賦), 권4ㆍ5는 오언고시, 권6∼8은 칠언고시, 권9ㆍ10은 오언율시, 권11은 오언배율, 권12∼17은 칠언율시, 권18은 칠언배율, 권19∼22는 오언절구ㆍ칠언절구ㆍ육언절구, 권23∼30은 조칙(詔勅)ㆍ교서(敎書)ㆍ제고(制誥)ㆍ책문(冊文)ㆍ비답(批答), 권31∼45는 표전(表箋)ㆍ비답, 권46∼48은 계(啓)ㆍ장(狀), 권49∼51은 노포(露布)ㆍ격서(檄書)ㆍ잠(箴)ㆍ명(銘)ㆍ송(頌)ㆍ찬(贊), 권52∼56은 주의(奏議)ㆍ차자(箚子)ㆍ잡문, 권57∼63은 서독(書牘), 권64∼95는 기(記)와 서(序), 권96∼98은 설(說), 권99는 논(論), 권100ㆍ101은 전(傳), 권102ㆍ103은 발(跋), 권104는 치어(致語), 권105는 변(辯)ㆍ대(對)ㆍ지(志)ㆍ원(原), 권106은 첩(牒)ㆍ의(議), 권107은 잡저, 권108은 책제(策題)ㆍ상량문, 권109∼113은 제문ㆍ축문ㆍ소문(疏文), 권114는 도량문(道場文)ㆍ재사(齋詞), 권115는 청사(靑詞), 권116∼121은 애사(哀詞)ㆍ뇌(誄)ㆍ행장ㆍ비명(碑銘), 권122∼130은 묘지(墓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소명태자가 만든 것을 본 딴 것이지만, 우리 문학의 전통을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우리나라의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집대성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동문선』은 되도록 많은 문체를 망라하여,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하였다. 문체의 종류로 보면, 55종에 걸쳐 있어, 중국『문선(文選)』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는 단 1편의 작품만 있는 노포(露布)와 같은 것도 설정되어 있어, 당시로서 자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되도록 다량을 선취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ㆍ김부식(金富軾)ㆍ이인로(李仁老)ㆍ이규보(李奎報)ㆍ이제현(李齊賢)ㆍ이곡(李穀)ㆍ이색(李穡)ㆍ이첨(李詹)ㆍ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 등 이 책의 편찬 직전까지의 인물들을 차례로 싣고 있다. 29인의 승려와 약간의 무명씨를 포함, 500인 가까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하나의 작품만 가지고, 등장한 작가가 220여 인에 이른다.

이는 당시 문헌의 인멸로 그들 작품의 전부가 전해지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우리 문학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인식 아래 한ㆍ두 편의 작품도 포괄하여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시는 약 4분의 1 정도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는 문(文)이다. 문 가운데에도 조칙ㆍ교서ㆍ제고ㆍ비답ㆍ주의ㆍ차자ㆍ첩ㆍ책제 등 정교(政敎) 관계 문장과 표전ㆍ축문ㆍ소ㆍ도량문 등 의례성(儀禮性)이 강한 문장에 해당되는 것이 1,130편 가량이나 된다.

특히, ‘표전’ 하나만 460여 편으로 전체 작품수의 10%를 넘어서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표전의 내용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주로 임금에게 축하나 감사를 올리는 경우나 사양할 경우, 진상할 때에 올리는 의례성이 강한 글이다.

이를 통하여 『동문선』의 선문(選文) 방향이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각적(館閣的) 문학관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교국가의 관찬서(官撰書)이면서, 도량문ㆍ재사ㆍ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儀禮文)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지배층의 이념이 철저하게 유교적이지는 않았다는 반영이 된다.

동시에 그 내용이 대부분 국가와 임금, 귀족의 복을 빌어주는 의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와 같은 통치층의 권위를 장식하는 효용에서 실려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들 작품의 거개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로 된 화려한 문장이어서, 전체적으로 형식미를 추구하고 있는 선정기준을 엿보게 한다.

작품의 선정에 있어,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예로 최충헌(崔忠獻)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한 시문이 많이 실려 있고,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塔銘), 그리고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元曉)의 일련의 불서의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혜심(慧諶)ㆍ일연(一然)ㆍ보우(普愚) 등 쟁쟁한 선승(禪僧)들의 선시(禪詩)는 거의 한편도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작품 선정자의 미의식에 맞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비록 불교 문학작품만을 모아놓은 책은 아니지만, 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학 특히 불교 시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동문선』의 편찬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역사적ㆍ문학적 의의나 분량으로 볼 때 맨 처음에 나온 『동문선』이 가장 중요하다. 서거정은 서문에서 조선조의 여러 대를 거쳐 나온 많은 인재들이 훌륭한 정기로 글을 지어, 그 글들이 생동감 있고 뛰어나다면서, 우리나라의 글은 송(宋)ㆍ원(元)의 글이 아니며, 한(漢)ㆍ당(唐)의 글도 아니며, 우리나라의 글이라고 하여, 당시의 독자적인 국학의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의식을 드러냈다.

『동문선』은 대체로 관료귀족의 미의식에 맞는 화려하고, 호부(豪富)ㆍ숭엄(崇嚴)한 미, 우아ㆍ온유의 미를 드러내고 있으며, 비장미(悲壯美)나 골계미(滑稽美)를 드러내는 작품은 드물다. 거의 대부분 상층 지배층 중심의 시문을 포괄적으로 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완성되어 유포되자, 성현(成俔)은 “이것은 정선(精選)한 것이 아니고, 유취(類聚)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이수광(李睟光)도 “『동문선』의 채선(採選)은 범위는 넓으나, 주선자(主選者)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취사(取捨)되었다.”며 공평성이 부족함을 비평하였다.

후대의 이러한 비난은 정치적인 안정에 만족하는 관학적인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동문선』의 전집적(全集的)인 성격을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풍부한 양을 남겨 당시의 문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후세에 커다란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의 우리나라의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집대성하였다는 의의와 함께 우리의 문학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 김규성, 『한국의 고전백선』, 동아일보사, 1969.
  • 김두종, 『국역동문선 해제』, 민족문화추진회, 1968.
  • 이경선, 『한국의 명저-동문선-』, 현암사, 1969.
  • 이우성, 『동문선해제』, 경희출판사, 1966.
  • 조정효, 「『동문선』에 나타난 려말선초 지식인의 대일(對日) 인식」, 『조선통신사연구』 제13호, 조선통신사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