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행실도언해본(三綱行實圖諺解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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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1 기준 최신판



조선 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1490년(성종 21) 한글로 언해한 책.

개설

성종(成宗) 대에 들어서면서, 삼강행실(三綱行實)의 장려정책을 펴기 위해 1434년(세종 16) 11월에 반포한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 사족(士族)의 가장(家長)과 부로(父老), 교수(敎授), 훈도(訓導)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내용을 새롭게 보태지는 않고, 각각의 사례 110개 중에 35개씩 가려내어 105인을 실었다. 이를 3권 1책으로 줄여 간행하였으며, 이것이 『삼강행실도 언해본』이다. 언해본은 본문의 상단 여백에 언해, 즉 한글 번역을 추가하여, 1580년(선조 13)과 1608년(선조 41)경에 중간(重刊)된 후 지속적으로 간행과 보급이 이루어졌다.

편찬/발간 경위

1428년(세종 10) 진주에 살던 김화(金禾)라는 자가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중국의 서적인 『효행록(孝行錄)』을 널리 반포하기로 하였다. 세종(世宗)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기존의 효행자 기록에 20여 명의 기록을 더하고, 고려 및 삼국시대의 사람 중에서 효행이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도 포함시키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0월 3일) 그 결과물인 『삼강행실도』는 1432년(세종 14) 집현전(集賢殿)에서 편찬하여 임금에게 바쳤다.(『세종실록』 14년 6월 9일)

성종 대에 들어서면서 삼강행실에 따라 풍습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목적 하에 『삼강행실도』의 언해(諺解)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489년(성종 20) 성종의 명에 따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허침(許琛)과 이조 정랑(正郞)정석견(鄭錫堅)이 기존의 『삼강행실도』를 산정(刪定)하였다.(『성종실록』 20년 6월 18일) 그 결과 효자도, 충신도, 열녀도에 각각 110명을 수록했던 것을 각기 35명으로 추려 3권 1책의 언해본을 간행하였다. 이어 1491년(성종 21) 성종은 전국 각지에 『삼강행실도 언해』를 보급하게 하였다.(『성종실록』 21년 4월 1일)

『삼강행실도 언해』는 번역 방식에 따라 의역(音譯) 계통과 직역(直譯) 계통으로 나눠지며 조선 초기에는 의역계통이 간행 보급되다가 조선 후기에는 직역계통으로 바뀌었다. 대체로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서적을 제작하여 각 지방에 나눠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飜刻)하여 일반 백성에게 배포하였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후에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비롯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편찬에 바탕이 되었다.

서지 사항

총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로 39.0㎝, 가로 25.0㎝이다. 지질은 한지이다.

서울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성암고서박물관, 성균관대학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영국 국립도서관, 버클리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삼강행실도』는 본래 언해가 없는 형태였으나‚ 1481년(성종 12)에 먼저 열녀편이 언해(諺解)되었고‚ 1489년(성종 20)에 이르러서는 수록인물을 대폭 산삭(刪削)한 후 각각의 인물에 언해를 달았다. 그리고 이 산삭언해(刪削諺解)된 『삼강행실도』는 이후 간행되는 여러 행실도들의 기준이 되었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권수와 본문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문본과 달리 세종의 「반포교지문(頒布敎旨文)」 및 맹사성(孟思誠)의 「진전문(進箋文)」은 없고, 권채(權採)의 서문만 수록되어 있다. 본문은 효자·충신·열녀로 구분되어 있고 시작되는 각 항목의 앞부분에 2단으로 해당 목차가 수록되어 있다. 이어 효, 충, 열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한 판화와 뒷면에는 인물들의 행적과 시문을 수록하였다. 해당 인물들의 행적을 언해한 언해문은 본문의 상단 여백에 나타나 있다.

언해본의 간행 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위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 이 책은 원간본이 간행된 후 여러 번에 걸쳐 중간되어 현재 전해지는 이본의 수가 상당히 많은데, 대부분 간행된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또한 부분적으로 보판을 가지고 나온 책도 많아서, 이들 간의 계파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언어사실과 번역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원간본 계통, 1581년(선조 14) 중간본 계통, 1730년(영조 6) 중간본 계통이 그것이다.

원간본과 그 계통의 후쇄본을 비교해 보면, 공통적으로 방점과 ‘ㅸ, ㅭ, ㆅ’까지 나타나고, 한자와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식의 한자음 표기가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점은 세종 대의 초기 한글 문헌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비록 원간본이 15세기 말에 나왔지만, 세종 때부터 번역이 시작되었으므로, 그 때의 언어가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자음 표기가 개음절의 종성에 ‘ㅇ’자를 표기하지 않은 점은 특이하다. 이러한 표기는 1514(중종 9)년에 나온 『속삼강행실도』에 그대로 이어진다.

두 번째 계통의 책들은 원간본과 차이가 있는데, 첫째, 방점이 없다는 점. 둘째, 언해에서 한자가 사라지고 『동국정운』식으로 표기되던 한자음이 현실음으로 표기된 점. 셋째, 원간본의 협주가 본문으로 편입된 점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16세기말의 언어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ㅿ, ㆁ’등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세 번째 계통의 책들은 1730(영조 6)년 각도 감영에서 간행된 것들로서 위의 선조판과 번역 자체를 달리하며, 내용도 큰 차이를 보인다. 다만 각 시대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고 있어 각 시대의 언어를 비교해 보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의의와 평가

『삼강행실도 언해본』은 조선 시대의 지배 철학인 유교 사상을 실제 사건과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교육적인 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림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 미술사에도 길이 남을 위대한 유산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언어 자료를 제공하여 국어학과 국어사 연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실(http://e-kyujanggak.snu.ac.kr)
  • 강명관,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 김훈식, 「『삼강행실도』 보급의 사회사적 고찰」, 『진단학보』85, 진단학회, 1998.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세종대왕기념시사업회,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2.
  • 주영하 외 4명,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8.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
  • 홍윤표, 「삼강행실도의 서지 및 국어사적 의의」, 『진단학보』85, 진단학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