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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1 기준 최신판
| 주요 정보 | |
|---|---|
| 대표표제 | 논어언해 |
| 한글표제 | 논어언해 |
| 한자표제 | 論語諺解 |
| 분야 | 철학/유교/국어 |
| 유형 | 문헌 |
| 지역 | 한국 |
| 시대 | 조선 |
| 왕대 | 선조 |
| 집필자 | 성낙수 |
| 간행년일 | 1590년(선조 23) |
| 권책수 | 4권 4책 |
| 사용활자 |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 |
| 소장처 | 도산서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 논어언해(論語諺解) |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 『선조실록』 7년 10월 19일, 『선조수정실록』 18년 1월 1일, 『선조실록』 20년 12월 25일 | |
선조(宣祖) 대에 『논어(論語)』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
개설
『논어언해(論語諺解)』는 선조의 명에 따라 중국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논어』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한 책이다. 4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산해(李山海)·정철(鄭澈) 등 당대의 대표적 유신들 31인이 참여해 1590년(선조 23)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논어』는 공자(孔子)의 언행록과 관련이 있는 사서(四書) 중 하나로, 공자가 제자들 또는 당시 사람들과 대화한 내용, 그리고 공자의 가르침과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주희(朱熹) 이후 유교(儒敎)의 경전 가운데 『논어』가 가장 중시되면서, 모든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원(元)나라 이후로는 과거(科擧)에 있어서도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어, 『논어』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편찬/발간 경위
『논어』는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들어와 학자의 필독서로써 널리 보급되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고려 말에 들어온 성리학을 그대로 계승·발전시키면서 『논어』는 더욱 중시되었다. 1392년(태조 1)에 과거 제도가 확정된 이후 『논어』는 과거의 시험 과목으로 중시되었으며, 성균관 교육 과정에서도 사서·삼경은 가장 중요한 교과 과목으로 자치매김 하였다.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 언해본을 발행하였는데, 우선 이황(李滉)이 1570년(선조 3) 『삼경사서석의(三經四書釋義)』를 지었고, 이어 선조의 특명으로 이루어진 『논어언해』 4권과 이이(李珥)가 지은 『논어율곡언해(論語栗谷諺解)』 4권이 있다.
언해 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선조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에 유숭조(柳崇祖)·이황·이이 등은 경전(經典)에 토를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유희춘(柳希春)은 1574년(선조 7)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먼저 『대학(大學)』과 『논어』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선조실록』 7년 10월 19일)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선조는 1585년(선조 18)에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경서에 구결을 달고 해석하는 방식이 유학자들마다 다름으로써 빚어지는 혼란을 바로잡으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논어언해』는 『대학언해(大學諺解)』‚ 『맹자언해(孟子諺解)』‚ 『중용언해(中庸諺解)』‚ 『소학언해(小學諺解)』 등과 함께 간행되었다.(『선조수정실록』 18년 1월 1일) 이렇게 간행한 교정청본을 관본(官本)이라고 하여 개인본과 구별하게 하였다. 이 사업에는 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한백겸(韓百謙)·정개청(鄭介淸)·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인 1586년(선조 19) 『소학(小學)』을 시작으로 1587년(선조 20)에는 사서삼경의 언해가 모두 끝이 났다.(『선조실록』 20년 12월 25일)
한편 이 책에는 편찬과 간행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함께 간행된 『소학언해』의 범례와 발문(跋文) 및 관여관원열함(關與官員列銜), 그리고 『논어언해』의 ‘만력십팔년칠월일(萬曆十八年七月日)’이라는 내사기(內賜記)로 보아, 정철 등 당대의 대표적 유신들 31인이 참여해 1590년(선조 23)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서지 사항
4권 4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정청에서 간행하였다. 금속활자인 을해자체 경서자(乙亥字體經書字)로 간행되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이본(異本)이 전한다. ‘만력사십년구월일(萬曆四十年九月日)’, ‘숭정사년윤십일월일(崇禎四年閏十一月日)’의 내사기가 있는 책이 있는데, 각각 1612년(광해군 4)·1631년(인조 9)에 간행된 책이다. 또한 1810년(순조 10)·1820년(순조 20)·1822년(순조 22)·1862년(철종 13)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그밖에 간기를 알 수 없는 이본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10행 17자본, 10행 19자본, 10행 23자본으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나, 표기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이가 언해한 『논어율곡언해』이다. 이것은 개인이 언해한 책이기 때문에 다른 『논어언해』와 차이가 있다. 『논어율곡언해』는 원문의 한자를 언해문에 그대로 사용하여 원뜻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논어언해』는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순수 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원문에 달린 토에는 큰 차이가 없다.
구성/내용
『논어』는 총 20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학이(學而)」·「위정(爲政)」·「팔일(八佾)」·「이인(里仁)」·「공야장(公冶長)」·「옹야(雍也)」·「술이(述而)」·「태백(泰伯)」·「자한(子罕)」·「향당(鄕黨)」·「선진(先進)」·「안연(顔淵)」·「자로(子路)」·「헌문(憲問)」·「위령공(衛靈公)」·「계씨(季氏)」·「양화(陽貨)」·「미자(微子)」·「자장(子張)」·「요왈(堯曰)」인데, 이는 모두 그 편 첫머리의 첫 구절 맨 첫 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은 것이다.
이 책에의 국어학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여기에서 사용된 언어는 중세어의 말기를 넘어가는, 즉 16세기 말경의 양상을 보인다. ② ‘ㅿ’음은 고유어에서 ‘-에’, ‘나가다’ 등 몇 개만 나타나고, 다른 데는 잘 쓰이지 않았으나, ‘而’, ‘仁’, ‘人’, ‘讓’, ‘如’처럼 한자어에는 잘 쓰였다. ③ ‘·’는 ‘ᄀᆞᆯᄋᆞ샤’, ‘ᄒᆞᄂᆞ니’처럼 고유어나 한자어에 잘 쓰였다. ④ ‘ㆁ’는 우리말의 상대높임법으로 나타나는 ‘니ᄅᆞ잇가’, ‘ᄒᆞ잇고’처럼 잘 쓰였다. ⑤ 성조(聲調)는 비교적 성실하게 표기했다. ⑥ 자음동화가 많이 나타난다. ⑦ 받침 중에서 ‘ㄷ’처럼 중화된 음으로 표기되는 현상이 있다. ⑧ 구개음화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⑨ ‘허믈이’, ‘손을’, ‘몸이’처럼 체언이나 어간이 받침으로 끝날 때 분철하여 표기한 예가 많다. 이는 형태소를 인식했다는 증거이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국어학적 특징 중의 하나로 의문형 ‘-ㄴ다’ 및 ‘-다’가 6개 확인되는데, 이와 같이 2인칭 직접 의문형 접미사로서, 당연히 주문장(主文章)의 종결접미사(終結接尾辭)로만 사용된다. ‘-ㄴ다’ 및 ‘-다’ 의문형(疑問形)은 모두 ‘-엇다’형으로 나타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형식은 과거 시제를 나타내던 의문형‘{-ø-}+{-다}’와 바꾸어질 수 있다. 과거 시제의 의문 어미 ‘{-ø-}+{ㄴ다}’가 현재 시제의 평서형 어미인 ‘-ㄴ다’로 변화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논어언해』의 도산서원본은 유교(儒敎)의 연구에도 중요하지만, 『효경언해(孝經諺解)』와 함께 원간본으로서 방점을 가지는 최후의 문헌으로 중세 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밖에 다른 이본들은 중세 국어에서 근대 국어로 변하는 과정의 국어사연구를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김해정, 『사서언해의 비교연구』, 보고사, 2006.
- 권영대, 「경전 해석학의 방법론적 연구-관본 논어언해의 구결을 중심으로」, 『동양학』 25,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1995.
- 김항수, 「16세기經書諺解의思想史的 고찰」, 『규장각』 10, 서울대학교 도서관, 1987.
- 옥영정, 「17세기 개인 출판의 四書諺解에 관한 고찰-1637년 간행의 사서 언해를 중심으로」, 『서지학연구』 27, 서지학회, 2004.
- 율곡학회, 『율곡학 연구 총서-논문류』1, 사단법인 율곡학회, 2007.
- 이숭녕, 「『대학언해』의 율곡본과 관본과의 비교 연구」,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 아세아문화사,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