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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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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백련초해 |
한글표제 | 백련초해 |
한자표제 | 百聯抄解 |
분야 | 국어/한문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김인후(金麟厚) |
권책수 | 1권 1책 |
소장처 | 규장각, 필암서원, 송강사,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백련초해(百聯抄解) |
16세기에 초학자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하여 김인후(金麟厚)가 연구(聯句) 100수를 뽑아 한글로 해석을 붙인 책.
개설
『백련초해(百聯抄解)』는 초학자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하여 칠언고시(七言古詩) 중에서 연구(聯句) 100수를 뽑아 한글로 해석을 붙인 책이다. 김인후(金麟厚)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시 원문의 각 한자마다 석과 음이 달려 있어 한자 교본(敎本)의 성격도 띠고 있다.
편찬/발간 경위
우리나라의 조선조 중반, 인종(仁宗), 명종(明宗), 선조(宣祖) 초기는 국가의 기본 이념인 성리학의 최전성기였다. 이때를 장식한 기라성 같은 학자로는 영남에는 이황(李滉), 조식(曺植)이 있었고, 기호에는 이이(李珥), 그리고 호남에는 기대승(奇大升)과 김인후가 있었다. 김인후는 장성 출신으로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기도 하였고, 기대승이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할 때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대학자였다.
그가 한시 명작품 중 백 개의 연(聯)을 가려, 이를 한글로 해설한 책이 『백련초해』인데, 이것은 바다 건너 일본 등으로 전파되기도 한 명저이다. 이 책은 연(聯)과 한글 해설로만 되어 있을 뿐 그 연의 출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후학들의 연구로 약 1/4 정도가 규명되었다.
서지 사항
총 1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규장각, 필암서원, 송강사,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가장 이른 판본의 한자 새김이 광주판 『천자문(千字文)』과 매우 유사하고, 이 책이 전라도 방언의 요소를 보인다는 점에서 편찬자가 김인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1576년(선조 9)에 편찬된 『고사촬요(故事撮要)』의 책판 목록에 평양과 장흥에 이 책의 책판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도쿄대학 소장본은 16세기 중엽 이후 장흥판으로 추정된다. 국내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의 중간본 및 복각본이 목판본 및 필사본의 형태로 여럿 전하는데, 필암서원본, 송광사본, 일사본, 장석련 소장본 등이 그것이다. 장성의 필암서원과 순천의 송광사에는 책판도 남아 있다.
또한 구소련과학원의 레닌그라드 동방학연구소에도 애스턴(W.G. Aston) 구장본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판본으로 추정되는 도쿄대학 소장본은 한시의 각 글자마다 음과 훈이 달려 있고 번역이 함께 실려 있는 데 반해, 임진왜란 이후의 판본들에서는 한자의 새김이 없고 연구(聯句)의 순서와 번역도 조금 다르다. 이들 임진왜란 이후의 판본들은 연구의 순서와 번역에 있어서도 서로 차이를 보인다.
외솔최현배(崔鉉培)는 『한글갈』에서, “가람이병기(李秉岐) 선생이 소장한 책의 말미에, ‘이것은 하서(河西)김인후 선생이 선집 주해한 것인데, 그 판각의 글씨는 바로 선생의 수필(手筆)이요, 그 판본(板本)이 필암서원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판본의 한글로 보아 명종조판(明宗朝版)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백련초해』에 실려 있는 연구(聯句)는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일화가 소개되어 있는 김시습(金時習)과 연관된 것이 가장 처음에 실려 있고, 이 연구는 『파한집(破閑集)』에도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세종(世宗) 때에도 이미 찬집된 것인데, 김인후에 의해 정리되고 언해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성/내용
한시(漢詩)는 당음(唐音)이라고도 하는데, 서당에서 경서(經書)를 강학하는 틈틈이 여가로 수백 편씩 암송하거나 습작을 하는데 이를 ‘자모듬’이라고 하였다. 자모듬을 하기 전에 선행되는 것이 5언으로 이루어진 추구(推句)와 7언으로 이루어진 『백련초해』를 기본적으로 암송하는 것이었다.
한편 연(聯)은 다섯 글자 또는 일곱 글자로 된 구(句) 한 쌍을 지칭한다. 중국 한시는 두 개의 연으로 구성된 절구와 네 개로 구성된 율시(律詩)가 있다. 그리고 절구든 율시든 연의 마지막 글자는 한문 전체가 106개의 소그룹으로 나뉘는 동일한 단위에 속해야 하며, 이를 운(韻)이라 지칭한다. 흔히 운을 ‘뗀다’는 말은 시에 적용해야 할 운을 제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한자의 발음 분류인 성조 중 고저가 없는 평성(平聲)과 고저 즉 고에서 저로, 저에서 고로, 고에서 저로 다시 고로 기울기가 있는 측성(仄聲)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 배열되어야 하는 원리가 있다.
이러한 규칙 등은 한시가 시라기보다 가사 즉 노랫말이라는 것에 연유한다. 중국의 시는 주(周)나라의 『시경(詩經)』과 초(楚)나라의 『초사(楚辭)』가 맨 처음 등장하며, 이때는 자유시였으나 한(漢)나라 시대 이후 절구, 율시 등 정형시로 바뀐다. 시경에서 ‘풍(風)’ 이라 함은 서민들의 노랫말이고 ‘아(雅)’라 함은 궁중 연회의 노랫말이었다.
『백련초해』에서 한시의 연구(聯句)는 이백(李白), 두보(杜甫), 유장경(劉長卿) 등 당대(唐代)의 시인들이 지은 칠언율시 중에서 함련(頷聯) 또는 경련(頸聯)에서 가져 온 것이다. 연구(聯句)들은 대체적으로 제재 별로 분류되어 있어서, ‘화(花), 산(山), 춘(春), 풍(風), 월(月), 송(松), 죽(竹), 강(江), 지(池)’ 등의 순서를 보인다. 판본에 따라 ‘백(白), 홍(紅), 청(靑)’ 등과 같이 색채별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 책은 당대(唐代)의 칠언율시 중에서 연구(聯句)를 선별하고 여기에 언해를 붙였다는 점에서 『두시언해(杜詩諺解)』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시의 각 한자마다 음과 훈을 달고 있다는 점에서 『천자문』, 『유합(類合)』, 『훈몽자회(訓蒙字會)』와 같은 한자 학습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도쿄대학 소장본은 ‘ㅿ, ㆁ’등이 나타나는데, ‘ㅿ’은 큰 혼란을 보이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판본임에도 방점이 없다. 이 판본의 한자 새김은 광주판 『천자문』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데, 예컨대 ‘不 안득불, 未 아미, 上 마’에서 나타난다. 애스턴 구장본의 경우 수록된 한시의 종류와 순서, 그리고 ‘ㅿ, ㆁ’이 사용된 예가 보인다는 점에서 동경대학 소장본과 유사하지만, 한자의 새김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의 판본들과 유사하다. 임진왜란 이후의 판본들은 한시에 한자의 음만 있을 뿐, 한자의 새김이 없으며, ‘ㅿ, 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서재극, 「百聯抄解(동경대본)의 釋에 대하여」, 『한국학논집』1, 계명대학교, 1973.
- 석주연, 「『百聯抄解』의 異本에 관한 연구」, 『규장각』22,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9.
- 손희하, 「百聯抄解의 어휘의미론적 고찰」, 『어문논총』10·11, 전남대학교, 1989.
- 신중진, 「백련초해 해제」, 『규장각소장어문학자료』어학편 해설,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1.
- 안병희, 「中世語의 한글 資料에 대한 綜合的 考察」, 『규장각』3, 서울대학교 규장각, 1979.
- 장석련, 「百聯抄解異本考」, 『청주대논문집』12, 청주대학교, 1979.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