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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1 기준 최신판



1449년(세종 31)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김수온(金守溫)이 편찬한 부처님 사리에 대한 영험기.

개설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는 세종의 명을 받은 김수온이 세종 31년(1449)에 간행한 것으로, 내불당(內佛堂) 조성 과정과 사리(舍利) 분신(分身)의 이적을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세종이 지은 7곡의 악곡과 9편의 악장으로 구성된 ‘친제신성(親制新聲)’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에 의지하던 세종은 1448년(세종 30), 1433년(세종 14)에 혁파한 문소전(文昭殿)에 있던 내불당(內佛堂)을 재건하게 하였다.(『세종실록』 30년 7월 17일),(『세종실록』 30년 8월 5일) 그 명에 따라 궁성 북쪽에 불당을 준공하였는데, 불전 1칸, 승당 3칸, 선당(禪堂) 3칸, 정문과 주방과 곳간 등이 26칸이었다. 또 황금으로 삼존불을 조성하고, 약사여래와 아미타불, 보살상과 나한상을 조성하여 모셨으며, 대자암(大慈庵) 주지 신미(信眉)와 김수온으로 하여금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짓게 하였다. 또한 세종은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발대원지곡(發大願之曲)」·「포법운지곡(布法雲之曲)」 등 새로운 악곡(樂曲) 7수를 만들고, 「귀삼보(歸三寶)」·「찬법신(贊法身)」·「찬보신(贊報身)」·「찬화신(贊化身)」 등 9수의 악장(樂章)을 만들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도 새로 저술한 『월인석보(月印釋譜)』를 받들어 올렸다.

이에 11월 18일 왕은 궁궐 안에서 재계하고 백관에게 형벌과 도살을 금한 뒤 51명의 비구승을 새 절에 모아 융성하게 재를 베풀고 새로 조성한 불상을 점안하였다. 그리고 12월 6일 낙성식을 개최하였는데, 세종은 곤룡포 두 벌과 침수향 1봉을 석가여래상에 올리며 “나의 효성이 능히 부처님을 감동시켜 대중에게 감응을 보이기를 지성으로 기원한다”고 하였다. 이때 불전에서 방광하고, 사리탑 앞에 광채가 찬란한 사리 두 개가 나타났으므로 모인 사람들이 왕과 함께 크게 경탄하였다는 내용이 『사리영응기』에 기록되어 있다.

서지 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30.3㎝, 가로19.8㎝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육당문고, 동국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사리영응기』에는 세종의 ‘친제신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노래가 아닌 가(歌)ㆍ무(舞)ㆍ악(樂)으로 구성된 정재(呈才)로, 연꽃ㆍ작약꽃ㆍ모란꽃을 든 무동의 춤과 다수의 아악기 및 동발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친제신성’이 제례악에 준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불교 의례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친제신성’의 악장 9편은 그 내용 및 시상 전개에 있어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귀삼보』는 서사, 『찬법신』~『찬팔부』는 본사, 『희명자』는 결사에 해당한다. 이들 악장은 ‘예찬 대상의 제시→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삼보의 뛰어난 공덕 예찬→열성(列聖)의 성불(成佛) 희구’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친제신성’ 전체의 주제의식은 ‘삼보의 공덕 제시’와 이를 통한 ‘성불의 희구’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친제신성’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고 작자가 같은 『월인천강지곡』과 비교된다. 『월인천강지곡』이 백성의 교화와 당시 불교계의 순화를 목적으로 하였다면, ‘친제신성’은 세종 자신과 왕실 가족의 위안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친제신성’의 주제의식이 열성의 성불이고, 중생 제도 내지 교화라는 불·보살의 공덕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친제신성’ 역시 세종의 불교 순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불과 중생 제도의 강조는 천당·지옥의 화복설(禍福說)과 이로 인한 기복 신앙의 유행에 대한 경계 내지 교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리영응기』의 소재인 세종의 ‘친제신성’은 세종 개인과 왕실 내심의 위안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생교화와 성불은 당시 불교계에 대한 세종의 순화 내지 교정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조선 초기에 ‘훈민정음’이 창제됨으로써, 한자 차자표기에 기대어 불안하게 표기되던 고유어 이름이 비로소 제 소리값대로 적히는 계기가 열렸으나, 정서법은 확립되지 않아 계속하여 이두식 한자표기를 이용하여 인명표기를 하였다. 『사리영응기』에는 ‘훈민정음’으로 적힌 고유어 이름이 보이는데, 이것은 정 7품과 종 8품 관리 이름이다. 이를 보아 조선 중기까지는 지배층 전부가 한자어 이름을 썼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前典樂署典律臣韓실구디, 前上林園司正臣朴검둥, 前上林園司正臣朴타내, 前上林園司正臣金올마대’와 같은 것이 있고, 47명의 사람 이름이 성씨와 함께 기록돼 있었다. 여기에는 이름들이 모두 한글로 나와 있는데, ‘막동, 타내, 올마대, 오마디, 오마대, 오망디, 오미디, 쟈가둥, 마딘, 도티, 고소미, 매뇌, 가리대, 올미, 더믈, 샹재, 검불, 망오지, 똥구디, 수새, 쇳디, 랑관, 터대, 흰둥, 우루미, 어리딩, 돌히, 눅대, 아가지, 실구디, 검둥, 거매, 쟈근대, 북쇠, 은뫼, 망쇠, 모리쇠, 강쇠, 곰쇠’와 같이 우리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게 성은 한자로 적고 이름은 한글로 적은 것은 이 이름들을 한자로 표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고유어로 된 인명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할 자료로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 『세종실록(世宗實錄)』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 연구원, 1996.
  •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규장각』 3, 서울대학교, 1979.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아름다운 한글 글자체 600년전-한글 어제ㆍ오늘ㆍ내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0.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
  • 이정주, 「세종 31년(1449) 간 『사리영응기』 소재 정근입장인 분석」, 『고문서연구』 31, 한국고문서학회, 2007.
  • 이종찬, 『역주 사리영응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