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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0 기준 최신판
| 주요 정보 | |
|---|---|
| 대표표제 | 열성어필 |
| 한글표제 | 열성어필 |
| 한자표제 | 列聖御筆 |
| 분야 | 법첩서 |
| 유형 | 한문 |
| 지역 | 한국 |
| 시대 | 조선 |
| 왕대 | 경종 |
| 집필자 | 성낙수 |
| 저편자 | 조선 태조~경종 |
| 간행년일 | 1725 |
| 권책수 | 1첩(50장) |
| 소장처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 열성어필(列聖御筆) | |
조선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역대 임금의 어필(御筆)을 모아, 판각(板刻)한 법첩(法帖).
개설
『열성어필(列聖御筆)』은 조선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역대 임금의 어필(御筆)을 모아, 판각(板刻)한 법첩(法帖)이다. 내용은 태조 어필 4쪽, 문종 어필 4쪽, 세조 어필이 2쪽이나 이것은 강목(綱目)의 주자(鑄字) 중 대자(大字)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리고 성종 어필 6쪽, 인종 어필 2쪽, 선조 어필 9쪽, 원종 어필 3쪽, 인조 어필 6쪽, 효종 어필 18쪽, 현종 어필 8쪽, 숙종 어필 29쪽, 경종 어필이 9쪽으로 모두 102쪽이다.
이상의 어필 중 경종 어필을 제외한 숙종 어필까지 11대에 이르는 임금의 필적은 경종 3년(1723)에 판각하였는데, 모두 93쪽이다. 그리고 경종 어필 9쪽은 영조 1년(1725)에 보각(補刻)하여놓은 것이다.
경종 3년 4월 26일 내사본(內賜本)을 보면, 영조 1년 11월 6일 초각본(初刻本)을 거두어들여서 보각한 부분만을 보태어 다시 사급(賜給)하였음을 명시하였다. 영조는 즉위하는 대로 전왕인 경종 어필을 수습, 보각하여 내부에 수장하는 한편, 『열성어필』을 완결하여 놓았다.
편찬/발간 경위
『열성어필』 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1725년 3월 13일 경연에서 숙종의 찬문(贊文)이 붙은 태조어필(太祖御筆)과 선왕인 경종의 어필을 이미 간행된 『열성어필』에 추가하여, 다시 간행하자는 논의가 나와, 영조의 윤허를 받았다. 또 1723년(경종 3)에 간행된 『열성어필』 중 「숙종어필」에는 김창집(金昌集)의 이름이 삭제되어 있는데‚ 이들이 이미 복관되었으니, 이번 간행에서 삭제된 이름들을 원래대로 복구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이 또한 영조가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3월 24일에 종친부에서는 한성부(漢城府)에 감결(甘結)을 내려 계묘년(1723)에 반사된 『열성어필』을 모두 거두어들이도록 하였으며‚ 4월 10일에는 『열성어필』 간행을 담당할 구관당상(句管堂上)을 종친 중에서 뽑아 임명하였다. 또 4월 13일에는 조정 내외에 산재한 경종의 어필을 수집하도록 하는 한편 계묘년에 간행된 『열성어필』 중 교서관(校書館)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을 종친부로 옮겨와, 새로 간행할 어필의 저본으로 삼도록 하였다.
이후 어필의 수집과 교정 작업이 계속되던 중 6월 6일에 종친부에서 경종의 팔대자(八大字) 병풍을 수집하여, 영조에게 올렸고‚ 영조는 이를 목판에 새겨, 병풍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열성어필』 간행은 10월 7일에 완성되었고‚ 영조는 10월 8일에 간행에 참여한 관원들과 장인들의 명단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어 영조는 숙종의 어필도 병풍으로 만들도록 명하였으며‚ 이 병풍이 11월 7일에 완성되어 영조에게 진상됨으로써, 『열성어필』의 간행은 최종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서지 사항
1첩(50장)으로 구성되었고, 탁본(拓本)이다. 크기는 세로 42.5cm 가로 30.0cm이며,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어필은 제왕(帝王)의 글씨를 말하며, 어서(御書)ㆍ신한(宸翰)이라고도 한다. 또 황후와 왕후의 글씨도 어필이라고 하며, 세자(世子)의 글씨는 예필(睿筆)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왕이 승하하면 생전에 남긴 어필을 간행하고, 이를 존각(尊閣)에 간직하는 등 그 위업을 기렸다. 대표적인 예가 현종 초에 문종(文宗) 등 아홉 임금의 필적을 모아, 『열성어필(列聖御筆)』을 간행하고, 다음 왕이 즉위하면 선왕의 어필을 이어 간행했던 일이다.
이 법첩은 경종 때 선조ㆍ인조ㆍ효종ㆍ현종ㆍ숙종의 어필을 모아 판각하여, 목판으로 찍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선왕의 자취를 기리는 여러 사업의 하나로 왕이 남긴 글씨를 간행하는 관례가 있었다. 임금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필』은 1662년(현종 3)에 처음으로 간행되지만, 목판본 『열성어필』은 숙종 연간에 처음 간행되었고, 경종과 영조 초에 숙종, 경종의 어필을 덧붙여 추가로 간행하였다. 선조와 인조는 한석봉체, 효종ㆍ현종ㆍ숙종은 촉체의 대가들이었다.
계간의 전통은 정조 이후로 계승되지 않았다. 다만 정조는 선왕이 생전에 모각해 둔 어필을 인출하여, 『영묘어필(英廟御筆)』 목석판을 반사하였다. 그러나 순조 이후로는 선왕의 어필집조차 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1631년(인조 9)에 열성의 시문을 모은 『열성어제(列聖御製)』가 개간된 이래 1865년(고종 2)까지 십여 차례 계간된 것에 비하여, 매우 아쉬운 일이다.
『열성어필』의 간행에 있어 어필의 수집과 편집을 비롯한 일체의 과정은 종친부(宗親府)에서 주관하였고, 모각과 인출ㆍ장황 등 실제적인 공정은 교서관(校書館)에서 담당하였다. 제작 방식에 있어, 석판본은 음각ㆍ오금(烏金)ㆍ첩장(帖粧)으로 만들어졌으며, 목판본은 양각ㆍ일반 인출(印出)ㆍ책장(冊粧)(선장(線裝))으로 제작되었다. 이들 『열성어필』 첩/책은 조선후기 서적 간행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예들이다. 또 간행 후 봉안과 관리, 진상(進上)과 분장(分藏) 및 빈사(頒賜)를 통해 곳곳에 나눠 간직되고, 일반에게 배포되었다. 이처럼 『열성어필』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자취를 길이 전파시키는 대표적인 출판물이었다.
1725년(영조 1)에 『열성이필(列聖御筆)』을 새로 간행할 때의 기록들을 모아 정리한 책도 있는데, 이 책의 표지에는 ‘을사삼월십삼일(乙巳三月十三日)’이라고 쓰여 있다. 이는 이 책이 처음 기록된 날짜로 1725년 3월 13일부터 11월 21일까지의 기록들이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열성어필』 재간행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1725년 3월 13일의 경연 논의를 비롯하여, 이것을간행하는 과정에서 각 관청들 간에 주고받은 감결(甘結)ㆍ첩정(牒呈) 등의 공문서‚ 국왕의 전교(傳敎)와 비망기(備忘記) 등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종친부와 각 관청들 사이에 주고 받은 공문서들에는 기존의 『열성어필(列聖御筆)』 판본을 종친부로 이관하는 과정‚ 호조(戶曹)ㆍ군기시(軍旗寺)ㆍ재용감(財用監)ㆍ선공감(善功監)ㆍ장흥고(長興庫) 등에서 어필(御筆) 간행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조달한 과정과 그 내역‚ 모사관(模寫官)ㆍ사자관(寫字官)ㆍ서원(書員) 등 어필 간행에 참여한 관원들 및 균자장(均字匠)ㆍ마조장(磨造匠) 등 장인들의 인원수와 간행 공역에 참여한 기간‚ 이들에 대한 요미(料米) 지급 내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후기의 『열성어필』 간행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의의와 평가
현존하는 어필은 대부분 조선시대 것이다. 임금은 신하에게 서찰을 보내고, 궁궐의 전각에 게시할 글씨를 쓰며, 역대 명신과 충신의 비문을 쓰는 등 다양한 필적을 남겼다. 이들 어필에서 군왕의 위엄과 덕행, 군신(君臣) 사이의 정리(情理)를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 이완우, 「조선 후기 열성어필의 간행과 광포(廣布)」, 『장서각』 제30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 조계영, 「조선후기 왕실서책 장황(裝潢)시의 도침(搗砧)에 관한 고찰」, 『고문서연구』 제31집, 한국고문서학회, 2007.
- 조계영, 『조선후기 [열성어제]의 편찬과 보존』, 서울대학교 보고서,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