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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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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가례언해 |
한글표제 | 가례언해 |
한자표제 | 家禮諺解 |
분야 | 예학/국어학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신식(申湜) |
간행처 | |
간행년일 | 1632년 |
권책수 | 10권 4책 |
소장처 | 연세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가례언해(家禮諺解) |
신식(申湜)이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언해한 것을 신식의 아들 신득연(申得淵)이 간행한 책.
개설
1632년(인조 10) 원주에서 간행된 문헌으로, 1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해의 방식을 설명한 범례, 가례도언해(家禮圖諺解), 가례서언해(家禮序諺解), 본문, 한문으로 된 발문(跋文) 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연호·인물·서명 중에서 중요한 단어에 대한 주석을 난 위에 달아 놓아 특이하며, 『가례』를 널리 알린 공적도 있다. 17세기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특히 가족 명칭 등 당시의 어휘 자료를 제공하는 점에서 국어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편찬/발간 경위
발문에 “아버지가 만년에 언해한 것”이라는 기록과 서두의 ‘숭정임신(崇禎壬申 : 1632년) 원성개간(原城開刊)’이라는 간기(刊記)에 따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던 신득연(申得淵)이 아버지 신식이 생전에 언해한 것을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지 사항
이 책은 1632년 원주에세 총 10권 4책 목판본으로 편찬되었는데, 제10권의 47·48면은 완전히 훼손되어 있다. 세로 32.9cm 가로 21.6cm이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제1권은 ‘통례(通禮)·사당(祠堂)’, 제2권은 ‘통례·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 제3권은 ‘관례(冠禮)·관(冠)’, 제4권은‘혼례(婚禮)·의혼(議婚)’, 제5권은 ‘상례 일(喪禮一)·초종(初終)’, 제6권은 ‘상례 이(喪禮二)·성복(成服)’, 제7권은 ‘상례 삼(喪禮三)·조석곡(朝夕哭)·전상사(奠上食)’, 제8권은 ‘상례 사(喪禮四)·천구(遷柩)·조조(朝祖)·전부(奠賻)·진기(陳器)·조전(祖奠)’, 제9권은 ‘상례 오(喪禮五)·우제(虞祭)’, 제10권은 ‘제례·사시제(四時祭)·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례언해』의 서문에서는 “예(禮)에는 ‘본(本)’과 ‘문(文)’이 있으니, 명분을 지키는 것과 애경하는 일은 ‘본’에 속하며, 관례·혼례·상사·제사 등을 지내는 의식은 모두 ‘문’에 속한다. ‘본’은 집에서 일용에 떳떳한 예로써 하루도 닦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문’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의 처음과 나중을 규정하는 것이니, 비록 그 행함에 시간과 장소가 있으나, 하루도 강습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라고 ‘예’의 본질을 규정하고 그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가례언해 예’를 좋아하여 배우려 하는 선비가 있어도 그 요령을 듣고 배우지 못하면 ‘예’에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하여 예와 지금의 글과 서적을 깊이 연구하여 집대성하였으니, 원컨대 뜻이 같은 선비는 하루빨리 익혀서 힘써 행하면 옛사람들과 같이 심신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도리와 지나간 일을 회상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고, 국가의 교화를 숭상하며 백성을 인도하는 뜻에도 적으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간행 취지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발문 끝에 ‘득연신참판식계자(得淵申參判湜季子)’가 붓으로 쓰여 있고, 제10권의 47·48면은 완전히 훼손되어 있다.
한편 언해자 신식은 대곡(大谷)성운(成運)과 퇴계(退溪)이황(李滉)에게 사사한 후 1576년(선조 9)에 급제하였다. 그 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지사(知事)까지 되었다. 그는 예(禮)와 악(樂)을 밝히고, 효(孝)로써 정려(旌閭)까지 받았다. 이 책의 범례(凡例)에 의하면 첫째, 대자(大字) 정문(正文)을 먼저 쓰고, 그 밑에 한글로 음을 쓰고, 언해문에는 따로 썼다. 둘째, 소자주(小字注)는 한 자를 낮추어 쓰고, 언해문에는 본문(本文)은 쓰지 않고, 언해문만 썼다. 셋째, 연호(年號), 선유(先儒), 역대인물(歷代人物), 서적편명(書籍篇名), 물명(物名) 및 주어(注語) 중 특별히 해석할 때는 지두(紙頭)에 표제하였다. 넷째, 해석할 때 직역보다 의역으로 뜻을 통하게 하였다. 다섯째, 문자어(文字語)는 그대로 문자로 썼다. 여섯째, 고사(告辭), 축문서식(祝文書式) 등은 한글로 음을 달고 따로 해석은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책머리에 예(禮)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을 하고 다시 권1에서는 통례(通禮)로 사당을 해설하고 있다. 사당은 군자(君子)가 궁실(宮室)을 지을 때 먼저 정침(正寢)을 동쪽에 짓고, 사감(四龕)을 만들어, 선세(先世)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방친(傍親) 중에 후손이 없는 자까지 반(班)부해야 하며 제전(祭田)과 제기(祭器)를 구비해야 한다. 그리고 심의제도(深衣制度)를 논하였는데 대개 이것이 제1권에 포함되어 있다.
도식으로는 ‘가묘지도(家廟之圖), 사당지도(祠堂之圖), 심의전도(深衣前圖), 심의후도(深衣後圖), 착심의전양금상엄도(着深衣前兩襟相掩圖)’를 비롯한 27 개의 그림을 그리고 설명하여 가례를 알려 주고 있다.
국어학적으로는 근대국어로서의 특징을 보이며, 한자에 부기된 음은 당시의 현실한자음을 반영하고 있으고, 속음(俗音)도 보이고 있다. 또한 중세국어의 잔영도 남아, ‘ㆍ’가 말첫머리가 아닌 경우에 ‘ᄀᆞᄅᆞ치->ᄀᆞ르치-, ᄒᆞᄆᆞᆯ며>ᄒᆞ믈며, ᄃᆞ->다르-’처럼 ‘ㅡ’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예가 보이지 않으며, 주격조사에서 ‘가’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ㅿ’과 ‘ㆁ’이 나타나지 않고, 어두자음군에서 ‘ㅲ, ㅳ, ㅶ’과 같은 예가 보이는 것은 근대국어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처격조사의 혼용 양상이라든가, 개별어휘의 혼기 양상도 그러한 측징이라 할 것이다. 표기에서 중철표기의 예도 있지만, 연철표기가 일반적으로 쓰이며, 혼철표기의 예도 보인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이와 같이 17세기의 국어의 대표적인 자료로 평가받을 수 있다. 가족 명칭을 비롯하여, 당시의 어휘 자료를 다수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며, 책이 간행된 원주지역의 방언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방언사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책의 자료가 보여주는 한글 표기 양상은 문자 생활의 변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또 다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이상녀, 「『가례언해』의 음운론적 연구」, 『한말연구』11, 한말연구학회, 2002.
- 한재영, 「가례언해」, 『가례도언해』1·2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4.
- 홍윤표, 『근대국어 연구』, 태학사, 1994.
- 홍종선 편, 『근대국어의 이해』, 박이정,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