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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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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속삼강행실도 |
한글표제 | 속삼강행실도 |
한자표제 | 續三綱行實圖 |
분야 | 철학/국어학/윤리 |
유형 | 그림, 한글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신용개(申用漑) |
간행년일 | 1514년(중종 9) |
권책수 | 1책 |
소장처 | 서울대학교 일사문고, 일본 동양문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
1514년(중종 9)에 신용개(申用漑) 등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 보다 많은 효자와 충신, 열녀의 사례를 덧붙여 간행한 책.
개설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는 1514년(중종 9) 대제학(大提學)신용개(申用漑) 등이 『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 편찬한 책이다.『삼강행실도』 이후의 뛰어난 효자 36인, 충신 6인, 열녀 28인의 사례를 추가하였다. 각 예의 끝머리에 7절 2수(首)의 찬시를 붙이고, 각 사례마다 삽화를 하나씩 그려 넣었다. 이 책은 간행된 뒤 여러 차례 중간되었으며, 1797년(정조 21)에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의 두 책을 합하여, 5권 4책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삼강행실도』는 본래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설순(律循)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으며, 언해는 성종(成宗) 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514년(중종 9)에 신용개 등이 중종(中宗)의 명을 받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빠진 효자, 충신, 열녀들에 대한 사적(事蹟)을 수록하고 언해하였다.
서지 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목판본이다. 세로 35.6cm, 가로 20.6cm이고, 지질은 한지로 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일사문고와 일본의 동양문고에 소장 중이다.
구성/내용
이 책은 『삼강행실도』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의 사적을 그림과 한문으로 설명하고 시(詩)를 붙인 후 난상(欄上)에 한글로 번역을 실음으로써 『삼강행실도』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16세기 초의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ㅸ’, ‘ㆆ’ 등의 표기를 비롯해서, 15세기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는 예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삼강행실도』에 전적으로 이끌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교화서들과 마찬가지로 『속삼강행실도』 또한 원간본이 간행된 이후 오랜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간되었다. 백성을 계도할 목적을 가진 교화서의 속성상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이 책은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와 그 중간 과정을 대체로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원간본에는 한문 문장에 구두점이 찍혀져 있고, 국어 표기에도 방점과 반치음 ‘ㅿ’과 ‘ㆁ’이 쓰이고 있으며, 혼란되었기는 하나 순경음 ‘ㅸ’도 사용되었다.
1581년(선조 14)에 『삼강행실도』와 함께 중간된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원간본과 비교해서 표기법과 체재, 내용에 있어서 다소의 변화를 보인다. 이 책은 원간본과는 달리 난상(欄上) 언해가 한글만으로 되었고, 수록된 내용에서는 ‘심원척간(深源후斥姦)’조가 더 추가되어 충신이 5명에서 6명으로 늘어났다. 『속삼강행실도』는 1617년(광해군 9)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동국속삼강행실도』 1권에 대부분 재수록됨으로써 사실상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중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속삼강행실도』의 또 다른 중간본으로 1727년(영조 3)에 『이륜행실도』와 함께 평양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책 말미에 ‘정미윤이삼월일 기영개간(丁未閏三月日 箕營開刊)’이란 간기가 있어, 이 책이 간행된 연도와 월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18세기 초기 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만 서북 방언의 영향으로 이 시기의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구개음화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표기상 특징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세국어에서 성조(聲調)를 표현하던 방점(傍點)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둘째, 모음조화(母音調化)가 지켜지지 않았다. 셋째, 합용병서(合用竝書) 'ㅄ' 등 어두자음군이 사용되었다. 넷째, '·'(아래아)는 여전히 사용되었다. 다섯째, 끊어적기(分綴)와 이어적기(連綴)가 함께 사용되었다. 여섯째, 'ㅣ'모음 앞에서 'ㄷ, ㅌ'이 아직 구개음화되지 않았다.
한편 『삼강행실도』는 본래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 부제학설순(律循)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으며, 언해는 성종 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신용개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 · 수옹(睡雍)ㆍ송계(松溪)다. 영의정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고, 관찰사신면(申眄)의 아들로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에 사마시에 합격,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그 해에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그 뒤에 수찬 · 교리를 역임하고,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02년(연산군 8)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 판서(判書)를 거쳐 예조 참판(參判)이 되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형조 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弘文館) 대제학과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을 역임, 이듬해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名)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대제학 · 우참찬과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서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 예조 판서를 역임한 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중종 11)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중종 13)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성종은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를 벗어서 입혀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지지만, 여러 번 중간됨에 따라 각 시기의 이본들을 비교함으로써 언어 사실의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국어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큰 문헌이다
참고문헌
- 김원용, 「삼강행실도에 대하여」, 『삼강행실도 효자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2.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문지사, 1996.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
- 홍윤표, 「속삼강행실도 해제」, 『속삼강행실도 원간본ㆍ중간본』, 홍문각,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