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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20 기준 최신판
| 주요 정보 | |
|---|---|
| 대표표제 | 금강경삼가해 |
| 한글표제 | 금강경삼가해 |
| 한자표제 | 金剛經三家解 |
| 분야 | 종교/불교/국어학 |
| 유형 | 문헌 |
| 지역 | 한국 |
| 시대 | 조선 |
| 왕대 | 세종 |
| 집필자 | 성낙수 |
| 저편자 | 세조(世祖), 정희왕후(貞熹王后), 학조(學祖) |
| 간행처 | |
| 간행년일 | 1482년(성종 13) |
| 권책수 | 5권 5책 |
| 소장처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서울대학교 가람문고, 동국대학교, 성암문고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 『성종실록』 15년 2월 26일, 『세조실록』 13년 2월 17일 | |
불교 주요경전의 하나인 『금강경(金剛經)』에 대한 야부(冶父), 종경(宗鏡), 기화(己和) 등 3인의 해설을 번역한 책.
개설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는 『금강경』에 대한 다섯 가지 해설을 담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가운데 야보(冶父)의 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 득통(得通)의 설의(說誼) 등 세 가지를 추려서 엮은 것으로, 강렬한 선적 취향의 한국불교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라고도 하는데, 금강석과 같이 견실한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을 주요사상으로 하는 조계종의 근본경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 1482년(성종 13) 불심이 두터웠던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에 따라 승려 학조(學祖)가 언해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1448년(세종 30) 세종(世宗)은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금강경』을 언해하도록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482년(성종 13)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내수사(內需司)에서 을해자(乙亥字)를 써서 이 책을 인출ㆍ간행하였다.(『성종실록』 15년 2월 26일) 권말에 한계희(韓繼禧)와 강희맹(姜希孟)의 발문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세종 때에 왕명에 따라 왕세자(문종(文宗))와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이미 초고를 편성하여 번역하게 하였으나 탈고하지 못했는데, 이후 고승 학조가 교정하여 300질을 인출하였다고 한다.
학조는 생몰년 미상의 조선 초기 승려로, 학덕이 뛰어난 당대의 명승이었으며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로 칭송되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김계권(金係權)의 아들이고, 호는 등곡(燈谷), 황악산인(黃岳山人)이다. 신미(信眉), 학열(學悅) 등과 함께 선종의 승려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여러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이후 중종(中宗) 대에 이르기까지 1467년(세조 13)에는 금강산 유점사, 1488년(성종 19)에는 해인사 및 대장경판당을 중창하는 등 수많은 불사를 지었다.(『세조실록』 13년 2월 17일),
서지 사항
총 5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질은 맥고지(麥藁紙)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38.5cm, 세로 25.0㎝이고, 내수사에서 간행하였다.
대자(大字)는 정문대자(正文大字)로 9행 14자, 주해문은 을해자(乙亥字)로 11행 21자, 국문자는 더 작은 활자를 이용하여 2줄 21자로 인쇄되어 있다. 판심(版心)은 상하가 백구(白口)이며, 어미(魚尾)는 상하내향(上下內向)의 흑어미(黑魚尾)이고, 어미 사이에는 소자로 『금강경삼가해』라는 판심제와 권차(卷次), 장차(張次)가 있다. 본문 외에도 책머리에 『금강반야바라밀경』 서(序)와 『예장사문종경제송강요(豫章沙門宗鏡提頌綱要)』 서(序)가 언해되어 실려 있고, 책 끝에는 『금강경 하(下)』 다음에 추가되어 기록된 득통결의(得通決疑)가 언해 없이 원문만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중간된 일이 없고 원간본만 전한다. 권2∼5의 4책은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권1·5의 2책은 동국대학교 도서관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권3·4의 2책은 성암고서박물관에 있다.
구성/내용
『금강경삼가해』는 『금강경』을 5명의 대가가 해설한 『금강경오가해』에서 2명의 것은 덜고 야보(冶父) 천선사(川禪師)의 착어송(着語頌), 예장(豫章) 경선사(鏡禪師)의 제강(提綱), 함허당(涵虛堂) 득통(得通)의 설의(說誼)를 바탕으로 이 삼가(三家)의 주해(注解)만 원문에 구결(口訣)을 달고 언해(諺解)하고, 그 주해자의 이름은 원문 해당 부분의 서두에 음각(陰刻)으로 새겨놓았다.
『금강경삼가해』는 내용에서 구마라습(鳩摩羅什) 번역의 원문을 큰 글자로 게재하고, 한 자 내려 송과 제강을 쓴 후 다시 한 자를 내려 설의를 적었으며, 이 4종에 각각 작은 글씨로 구결을 달고 번역하였다. 정축자와 을해자를 함께 썼기 때문에 행자수에 차이가 있다. 경 본문은 1행이 15자이나, 야부의 송, 종경의 제강, 함허당의 설의 등은 1행이 21자이다. 하나의 반엽이 금강경 본문만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반엽이 9행이나, 하나의 반엽에 금강경 본문이 없거나, 1행 내지 2행 있을 때에는 반엽이 대개 11행으로 되어 있고, 하나의 반엽에 금강경 본문이 3행 내지 7행 있을 때에는 반엽이 대개 10행으로 되어 있다.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국어학적 특징이 보인다. 즉 각자병서가 동국정운식 한자음 이외에는 ‘ㅆ’을 포함하여 일체 사용되지 않으며, 어간말의 ‘ㅿ’은 유성음 앞에서 ‘ㅅ’과 혼동해서 쓰임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업슨’ㆍ‘업슨’과 같다. 유성자음으로 끝나는 체언 뒤에 조사가 결합될 때 분철 표기가 꽤 많이 나타나고, 일부 무성자음으로 끝난 체언의 경우도 분철 표기된 예들이 ‘조각이라’, ‘은’, ‘닐굽’ 등과 같이 쓰였다. 원순성 동화가 특징적으로 ‘외로’, ‘밧고로셔’, ‘보왐직며’, ‘견주워’, ‘초와’처럼 나타나고, 아직 방점이 사용되고 있으나 혼란이 심하며 ‘ㅸ’이 소멸되어 사용되지 않고 있다. 종결접미사 ‘오/우’가 ‘오/우’로 끝나는 용언 어근 뒤에서 융합되거나 생략되지 않고, ‘마초오미’, ‘나토오려’, ‘모도오’ 등과 같이 쓰였다. 또한 ‘칙칙(涵序)’, ‘議論 니어니와’ 등과 같이 오자나 탈자로 보이는 예들도 있다.
어휘에서 ‘스릐 그르호(寫之誤)’에서 ‘스릐’는 이전 시기 동명사형 접미사에 조사가 직접 결합한 용법의 잔영으로 볼 수 있어서, 의존명사 ‘이’의 용법과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녯 琴 잘 사미오’에서 ‘’은 회상법 접미사 ‘-더-’가 ‘--’로 나타난 15세기의 유일한 예이다. 그리고 ‘앛(所以)’(涵序), ‘니(時)’, ‘수늙(嶺)’ ‘자치다(止)’, ‘보로’, ‘와(蕩子)’, ‘룯다’, ‘감고(紫)’ 등 다른 문헌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단어들이 많이 보인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김영배, 「금강경삼가해 제1에 대하여-그 희귀어를 중심으로」, 『수련어문논집』3 , 부산여자대학교, 1975.
- 김주필, 『금강경삼가해, 국어사 자료와 국어학의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93.
- 불교문화연구소,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 동국대학교출판부, 1976.
- 심재완,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영남대학교출판부, 1981.
- 안병희, 「중세어(中世語)의 한 글자료(資料)에 대한 종합적(綜合的)인 고찰(考察)」, 『규장각』3 , 서울대학교,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