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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

개설

『춘추(春秋)』는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로, 경문(經文) 1,800여 조 및 1만 6,500자로 이루어진 최초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 은공(隱公)으로부터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 12공(公) 242년 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본래는 단행본이었지만, 지금은 주석서인 『춘추삼전(春秋三傳 : 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좌씨전(左氏傳))』의 부속 형태로 전하고 있다.

‘춘추’라는 말은 시간의 추이를 상징하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을 줄인 말로 ‘일 년 간(一年間)’이라는 뜻이다. 본래는 『오월춘추(吳越春秋)』·『여씨춘추(呂氏春秋)』·『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등처럼 주(周)나라 치하 각 제후국의 독자적인 편년사를 가리키는 통칭이었다. 일종의 궁정연대기(宮廷年代記) 형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공자(孔子)가 독자적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필삭(筆削)을 하면서 단순한 궁정 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유교 문헌 가운데 『춘추』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맹자(孟子)』의 「등문공하(滕文公下)」·「이루하(離婁下)」편이다. 여기에는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배출되는 혼란기에 공자가 명분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혀 세태를 바로잡고자 이 책을 지었다는 제작 동기가 서술되어 있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유효(儒效)」에서는 처음으로 『춘추』를 경(經)으로 다루었다. 이로부터 한대(漢代)에 이르러 비로소 『춘추』에 담겨 있는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밝히려는 춘추학(春秋學)이 성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춘추』를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 초기에 세종(世宗)은 1427년(세종 9)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명을 내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편찬하였던 것과 같이 『춘추』 또한 편찬하게 하였다.(『세종실록』 9년 9월 3일),(『세종실록』 9년 10월 28일) 이는 조선이 지향하던 유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목적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지 사항

1권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책의 크기는 세로 32.7cm, 가로 21.5cm이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공자가 편수(編修)하기 이전에 이미 노나라에는 『춘추』라고 불리는 사관(史官)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맹자』에는 춘추시대에 각각의 나라들이 각자 사관을 두어 사적(事跡)을 정리하였으며, 진(晉)나라에는 『승(乘)』, 초(楚)나라에는 『도올(檮杌)』, 노(魯)나라에는 『춘추』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노나라에 전해지던 기록을 공자가 자신의의 역사의식 및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편수한 것이 오늘날의 『춘추(春秋)』이다.

『춘추』는 1,800여 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글자는 16,500여 자(字)로 이루어져 있어 간결한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공자는 사실을 간략히 기록했을 뿐 비평이나 설명은 철저히 삼갔는데, 직분(職分)을 바로잡는 정명(正名)과 엄격히 선악(善惡)을 판별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에 따라 용어를 철저히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었을 때도 대상이나 명분에 따라 ‘시(弑)’와 ‘살(殺)’을 구분하였으며, 다른 나라를 쳐들어갔을 때도 ‘침(侵)’, ‘벌(伐)’, ‘입(入)’, ‘취(取)’ 등의 표현을 구분하여 사용했다. 이처럼 공자는 이 책에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혀 그것으로써 천하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 하였다. 이로부터 명분(名分)에 따라 준엄하게 기록하는 것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춘추』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며, 공자의 예(禮)와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 이념 아래 특정 사건이나 인물이 비판 또는 평가되고 있다. 즉 이 책은 사건에 의탁하여 대의명분을 피력한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공자의 독특한 필법이 경문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공자의 미언대의는 『춘추』의 서술 방식이나 용어 사용의 일정한 원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 경문의 내용이 지극히 간절(簡切)하여, 그것을 해석한 전(傳)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원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전을 대표하는 것이 이른바 ‘춘추삼전’으로 「공양전」·「곡량전」·「좌씨전」인데, 그 가운데 「좌씨전」은 기록된 사실과 그에 관련된 사실(史實)을 통해, 역사적·실증적으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구명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공양전」·「곡량전」은 경문을 그 자체로 직접 해석, 기록된 사실의 내재적 의미를 구명하고 있다. 이 ‘춘추삼전’에 수록된 경문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지만, 인명·지명·국명 등의 문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경문의 시작이 서기전 722년(은공 1년)인 것은 같지만, 끝이 「공양전」·「곡량전」은 서기전 481년(애공 14년), 「좌씨전」은 서기전 479년(애공 16)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대에 이르러서는 「공양전」·「곡량전」·「좌씨전」 순으로 학관(學官)에 채택되었다. 이후 삼전은 금고문학파(今古文學派) 사이의 논쟁 속에서 태학(太學)의 교재로서 우열을 다투었으나, 후한(後漢)의 정현(鄭玄) 이후에는 「좌씨전」이 가장 성행하였다.

현재 13경 속에는 3전이 각각 하나의 경전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춘추』의 경문은 「좌씨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래로 「좌씨전」을 유교의 주요 경전으로 삼고 애독하였다.

공자는 『춘추』를 통하여 역사에 나타나는 구체적 사건들에 대한 시비(是非)와 정사(正邪), 선악(善惡)을 분별하고,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대의를 표명하였다. 공자는 인(仁)을 실현하려는 목적 아래 춘추시대의 인물과 사건들에 대하여 엄정하게 비판 및 판단하였다. 다만 공자의 대의와 시대정신은 존주(尊周 : 주나라를 존경함)라는 점에서는 틀림이 없으나, 노나라 인물인 좌구명(左丘明)과 공자에게 있어서 존노(尊魯 : 노나라를 존경함)도 불가피하게 드러난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박성진, 「두예(杜預)의 춘추경전집해(春秋經傳集解)에 나타난 춘추필법(春秋筆法)과 포폄(褒貶)의 원칙 분석 - 좌전(左傳)의 범례(凡例), 변례(變例)를 중심으로」『순천향인문과학논총』 29, 순천향대학교, 2011.
  • 안예선, 「송대(宋代) 사서(史書)의 『춘추(春秋)』 계승 의식과 문학성의 관계 고찰」, 『중국문학연구』45 , 한국중문학회, 2011.
  • 안춘분, 「『춘추(春秋)』의 다양한 비판견해(批判見解)를 통해 본 춘추시대정신」, 『동양철학연구』 65, 동양철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