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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조선에서 법률로 적용한 명(明)나라의 기본 법전.

개설

『대명률(大明律)』은 명나라의 기본 법전으로 ‘명률(明律)’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현행법·보통법으로 활용된 형률서이다. 기본 원칙은 당률(唐律)과 대동소이하나, 당률의 형벌체계가 ‘태(笞)ㆍ장(杖)ㆍ도(徒)ㆍ유(流)ㆍ사(死)’의 오형이며, ‘사형(死刑)’의 경우 ‘교(絞)’와 ‘참(斬)’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에 비해, ‘자자(刺字)’의 형을 추가하고, ‘사형’에도 ‘능지처사(凌遲處死)’와 같은 극형을 새로 넣는 등 엄격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법률의 적용에서도 당률은 범죄 당시의 법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데 비해, 『대명률』은 재판 당시의 법을 그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적용하는 소급처벌을 행함으로써, 전단적(專斷的) 경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는 당률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실형주의를 전제로 하였으나, 『대명률』에서는 원(元)대의 배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살인 상해죄의 경우 매장은(埋葬銀)을 징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은 개국 직후 태조(太祖)의 즉위 교서에서 모든 공사(公私)의 범죄에 『대명률』을 적용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이에 『대명률』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다소 변형이 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법률의 원칙으로 작용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대명률』은 4차의 편찬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최초로 편찬에 착수한 것은 명나라 태조주원장(朱元璋)이 아직 오왕(吳王)으로 호칭되던 1367년이다. 좌승상(左丞相)이선장(李善長)을 총재관(總裁官)으로 임명하여 당률을 손질한 결과 이율(吏律) 18조, 호율 63조, 예율 14조, 병률 32조, 형률 150조, 공률(工律) 8조로 도합 285조로 된 율(律) 및 145조의 영(令)을 완성하였고, 여기에 『율령직해(律令直解)』라는 이름을 붙여 이듬해인 1368년 공포하였다. 그리고 주원장이 명나라 황제로 즉위한 뒤인 1373년 형부 상서(尙書)유유겸(劉惟謙)에게 명해 일부 수정을 가하였다. 이때 『대명률』은 당률의 편제를 따라 명례(名例)·위금(衛禁)·직제(職制)·호혼(戶婚)·구고(廐庫)·천흥(擅興)·도적(盜賊)·투송(鬪訟)·사위(詐僞)·잡범(雜犯)·포망(捕亡)·단옥(斷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 법률 가운데 일부를 다시 손질하고 새로운 법률을 보충하여, 모두 606조 30권으로 완성하였으며, 유유겸의 「진대명률표(進大明律表)」를 함께 실었다. 그러나 이 『대명률』은 그 뒤 부분적으로 개정 또는 추가된 것이 있었으므로, 이에 다시 1389년 형부의 건의에 따라 한림원(翰林院)과 형부의 관리들이 새로 공포된 법령들을 포함하고, 취사ㆍ선택하여, 458조 30권으로 된 『대명률』을 완성하였다. 편별은 명례율·이율·호율·예율·병률·형률·공률로 나누면서 명률(明律) 특유의 형식을 확립하였다.

한편 『대명률』의 주석서로는 하광(何廣)의 『율해변의(律解辯擬)』, 장해(張楷)의 『율조소의(律條疏議)』, 『명률집해부례(明律集解附例)』 등이 있으며, 대명률의 영향을 받은 조선에서도 고사경(高士褧)·김지(金祗)·정도전(鄭道傳)·당성(唐誠) 등에 의해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30권이 편찬되었다. 『대명률직해』는 『대명률』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이두로 『대명률』을 해석한 것이다. 1389년에 간행된 『대명률』을 저본으로 하고 있는데, 중국에는 1397년 『대명률』만 남아 있어 『대명률』의 변화를 살펴보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서지 사항

총 3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686년(숙종 12) 평안감영에서 간행한 것으로, 책의 크기는 세로 32.8cm, 가로 21.5cm이고,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구성/내용

이 책의 구체적 항목은 다음과 같다. 명례율 47조, 이율은 직제 15조, 공식(公式) 18조, 호율 호역(戶役) 15조, 전택(田宅) 11조, 혼인 18조, 창고 24조, 과정(課程) 19조, 전채(錢債) 3조, 시전(市廛) 5조, 예율은 제사 6조, 의제(儀制) 20조, 병률은 궁위(宮衛) 18조, 군정 20조, 관진(關津) 7조, 구목(廐牧) 11조, 우역(郵驛) 18조, 형률은 적도(賊盜) 28조, 인명(人命) 20조, 투구(鬪毆) 22조, 매리(罵詈) 8조, 소송 12조, 수장(受贓) 11조, 사위 12조, 범간(犯姦) 10조, 잡범 11조, 포망 8조, 단옥(斷獄) 28조, 공률은 영조(營造) 9조, 하방(河防) 4조 등이다.

『대명률』은 고려 말에 1374년의 것이, 조선 건국 초에는 1389년의 것이 들어왔다. 태조의 즉위 교서 이후 실제적인 활용을 위해 조준(趙浚)의 주관 아래 이두로 자구(字句)를 직해하고, 고사경·김지·정도전·당성 등이 이를 윤색하여, 1395년(태조 4)에 『대명률직해』를 서적원(書籍院)에서 주자(鑄字)로 간행하였고, 1446년(세종 28) 평안감영에서 중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명률』은 조선 초기부터 500년 동안 현행 형법전으로 활용하였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법률은 『대명률』의 원칙적 적용이었으나,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은 것은 바꾸어 썼다. 유형(流刑)의 이수(里數)와 형량를 비롯하여, 관명 및 제도, 노비법·재산상속법·오복제도(五服制度) 등에 이르기까지 특수한 것은 대폭 수정하여 시행하였다.

이후 시대가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새로운 법률서를 만들지 않고 『대명률』을 모법으로 한 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대명률』은 유교주의 원칙 아래 이루어진 법률서이기 때문에 유교 이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대명률』은 법보다 예(禮)를 중요시 하였고, 행형(行刑)에서도 관용주의를 택하는 등 유교 이념이 잘 구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유교 사회를 이상향으로 하던 조선에서는 『대명률』의 기본 정신에 따라 유교 국가를 완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둘째, 『대명률』은 중국의 형률을 집대성한 포괄적이고 정리된 법률서이다. 같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새로운 법률을 만들지 않고,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만 고쳐 쓰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명률』은 이와 같이 조선사회에 맞게 법규정을 변용한 사례와 신설된 조항에서 조선만의 독특한 사회구조와, 가치관 그리고 고유관습 등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 법문화가 수용된 이후 새롭게 생성된 통치규범을 통해 조선 사회만의 독특한 사회현상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대명률』이 현행법으로 적용됨에 따라, 그 해설서인 중국의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대명률부례(大明律附例)』·『율학해이(律學解頤)』·『율학변의律學辨疑』 등을 들여왔으며, 이들을 율과초시(律科初試)와 취재(取才)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김구진, 「대명률의 편찬과 전래」, 『백산학보』 29, 백산학회, 1984.
  • 이성무, 「경국대전의 편찬과 대명률」, 『역사학보』 125, 역사학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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