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정기(蘭亭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 주요 정보 | |
|---|---|
| 대표표제 | 난정기 |
| 한글표제 | 난정기 |
| 한자표제 | 蘭亭記 |
| 분야 | 시 |
| 유형 | 한문 |
| 지역 | 중국 |
| 시대 | 진 |
| 왕대 | 목제 |
| 집필자 | 성낙수 |
| 저편자 | 왕희지 |
| 간행년일 | 353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 난정기(蘭亭記) | |
중국 동진(東晉) 출신의 문인이며 서법가인 왕희지의 글.
개설
『난정기』는 명필, 명문장으로 유명한 중국 동진(東晉) 출신인 왕희지의 글이다. 이전에는 『임하서(臨河序)』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난정서』라고 하며, 또 『계첩(稧帖)』이라고도 한다. 『난정서』는 28행 324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필체는 미학적으로 우아한 편안함과 힘찬 정밀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8세기의 비평가들은 본문에서 한 번 이상 사용된 글자는 항상 다른 형태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이 글은 중국진나라 목제(穆帝)영화(永和) 9년(353) 3월 3일에 왕희지ㆍ손탁(孫綽)ㆍ사안(謝安) 등이 산음(山陰) 난정에서 계연(禊宴)을 베풀고 시를 지어 읊은 뒤, 왕희지가 서문으로 쓴 글이다. 중국 동진 시대 귀족들 특유의 교화되고 세련된 분위기 속에서 이 모임은 본래 지닌 종교적인 의미를 잃어버렸다. 참석자들이 술을 마시면서, 재미있는 시를 짓는 사교적인 모임으로 속화되었다. 『난정서(蘭亭序)』는 이 모임 참석자들이 시를 짓고, 모든 시가 모아진 뒤, 마지막에 왕희지가 직접 쓴 서문이다.
중국 당(唐)나라 현종 때 문인인 하연지(何延之)가 기술한 『난정기(蘭亭記)』를 보면, 당시 왕희지는 거나하게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繭紙;누에고치 껍질로 만든 종이로서 종이 질이 좋기로 유명함)에 서수필(鼠須筆; 쥐의 수염을 사용하여 만든 붓)로 28행, 324자를 써,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하는데, 이 글 중 특히 갈지(之) 자가 가장 많아 24자나 있으나, 자획의 변화가 있어 한 글자도 같게 쓴 것이 없었으니, 술이 깬 후 수 십 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스스로도 “신(神)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였다 하며,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당 태종은 왕희지를 숭배하여, 그의 글씨를 많이 수집하였는데, 특히 『난정서』에 관심이 깊어 지영(智永)의 제자 변재(弁才)에게 사자 숙익(肅翼)을 보내 이것을 교묘히 빼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은 그것을 평생 옆에 두고, 임종에 임하여, 소릉(昭陵)에 순장하라고 하였다 한다.
그래서 『난정서』는 소릉(昭陵)에 묻혀버렸고, 이 때부터 『난정서』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난정서』는 진본이 아니라, 진본을 보고 유명 서예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임서(臨書)한 여러 판본들, 그리고 진본 위에 기름종이를 바른 후 매우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듯 본을 뜬 모본(摹本)들이다.
수없이 많은 판본 중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북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풍승소(馮承素)의 모본으로, 당 중종(中宗)의 ‘신룡(神龍)’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어, 신룡본(神龍本)으로도 불린다. 유명한 서예작품이 기실 원본이 없다는 사실도 또한 흥미로운 점이다. 서예 작품으로 유명한 이 글은 문장 자체로도 매우 빼어난 명문이다.
구성/내용
이 글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인생을 즐기면서, 영원한 것을 동경하는 인간의 애절한 소망,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 등을 슬퍼하는 마음을 표현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부분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난정서(蘭亭敍)』는 다양한 형태로 수용되었는데, 특히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줄곧 서법의 전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신라시대 이래로 왕희지체는 선서(善書)의 기준이 되었다. ‘난정고사(蘭亭故事) 역시 계축(癸丑)년이나 상사일(上巳日)에 열린 문인들 아회(雅會)에서 시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난정기(蘭亭記)』나 『난정시(蘭亭詩)』에 등장하는 글자나 구절에서 집자(集字)하여 시를 짓거나, 『난정기(蘭亭記)』에 등장하는 글자만으로 집자체시를 짓기도 하는 등 난정수(蘭亭修)계는 시작을 통해 다양한 형식으로 수용되었다.
‘난정수계’는 그림을 통해서도 수용되었다. 그림의 경우 글씨나 시문처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림을 통해서 난정수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문사들의 아회 중에는 난정수계의 뜻을 잇고자 하는 모임들도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난정수계의 고사를 표방한 모임은 많이 있었지만, 명칭까지 난정수계를 표방한 모임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난정수계는 왕실의 유흥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정조(正祖)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상화조어(賞花釣魚)의 고사를 모방하여, 봄마다 각신(閣臣)과 내원(內苑)에서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것을 정례화 했다.
1788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각신이 주관하였고, 각신이 아닌 사람은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 1793년(정조17) 3월에 이르러 난수정계의 고사를 본떠서, 그 숫자를 더욱 확대했는데, 이 때에는 각신이 아닌 선비들까지 참여시켰다. 이는 난정수계의 숫자에 일치시키려 한 점도 있었지만, 『난정기』의 ‘소장함집(少長咸集)’의 의미에 부합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정조의 계축년 내원상화(內苑賞花) 모임은 왕희지의 난수정계가 있었던 영화 9년의 계축년 3월과 부합함으로써 그 의미가 부여되었고,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이는 궁중의 상화조어의 고사와 난정수계의 고사를 일치시킨 일로 정조의 통치행위의 일단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이후 난정수계의 수용양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정조의 지우(知遇)를 입은 여항인들이 중심이 된 옥계시사(玉溪詩社)는 난정수계를 모방하여, 성대한 시회를 열었다. 이는 19세기 여항인들의 시사(詩社)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난정수계는 그 자체가 행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 일반적인 시사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밖에 계축(癸丑)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사(詩史)에서 난정수계의 의미는 행사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 김윤수, 「상설고문진보대전과 비점고문」, 『중국어문학』 15권, 영남중국어문학회, 1988.
- 박철상, 「난정수계의 수용 양상과 시사(詩社)에 끼친 영향」『한문학보』 제26집, 우리한문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