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문답(東湖問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1569년(선조 2)에 이이(李珥)가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한 경륜(經綸)을 주객(主客)의 문답체로 서술한 글.

개설

『동호문답(東湖問答)』은 1569년(선조 2)에 이이(李珥)가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한 경륜(經綸)을 주객(主客)의 문답체로 서술한 글이다. 즉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율곡 선생이 34세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재임 중 자신의 정치관(政治觀)을 문답식으로 서술하여,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당시에는 젊은 관료들을 선발하여 잠시 직책을 떠나, 독서당(讀書堂)에서 여유있게 글을 읽도록 하였는데, 이때 월과(月課: 연구결과보고서)로 제출한 것이다. 이이가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면서 지은 것이다.

편찬/발간 경위

사가독서(賜暇讀書)란 홍문관의 유능한 젊은 문신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잠시 동안 정무를 떠나, 독서당에서 글을 읽고 연구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사가독서에 선발되는 사람은 유능하고, 학문의 가능성이 있은 젊은 문신이므로, 여기에 선발된다는 것은 하나의 영광이자, 앞으로 출세의 길도 약속되는 것이었다. 사가독서하는 사람들은 월과(月課: 다달이 제출하는 과제)로 글을 짓게 하였는데, 이 『동호문답』도 율곡의 월과로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31cm, 가로20.5cm이며,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동호(東湖)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어귀의 한강을 말한다. 한성에서는 한강을 동ㆍ남ㆍ서 3방향에 따라 달리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이 제각각이었다. 즉 옥수동 앞은 동호(東湖), 용산 앞은 남호(南湖), 마포 어귀는 서호(西湖) 등으로 불렸다.(동호대교는 여기서 유래한 듯함)

또 독서당(讀書堂)이란 말 그대로 글을 읽던 집으로서, 조선시대 때 나라에서 젊은 학자들에게 특별한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 한 곳이다. 일명 호당(湖堂)이라고도 하는데, 기원은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복궁 안에다가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을 장려한 세종은 과거에 급제한 관리 중에서도 젊고 어진 이를 뽑아, 글을 읽도록 배려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종 8년(1426)에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긴 말미를 주어, 조용한 절간에 가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시초로 문종, 단종 시대로 이어지다가, 세조 때 잠시 유명무실해진 후 성종 때에 제자리를 잡는다.

성종은 즉위 후 용산 한강가 언덕에 있는 빈 절을 고쳐, 사가독서하는 장소로 삼고, 그 이름을 독서당(讀書堂)이라 불렀다. 독서당이란 이름이 이 때 처음 등장한 것이다. 용산 앞강을 남호(南湖)라고 했기 때문에 용산 독서당은 남호당(南湖堂)이라고도 불렀다. 중종 12년(1517)에는 한강변의 한적하고, 경치가 뛰어난 곳에 새로 독서당을 짓게 했는데, 이곳이 바로 동호당(東湖堂)이라 불리는 동호독서당이다. 『동호문답(東湖問答)』이란 제목도 바로 이에 연유하고 있다. 동호독서당은 이후 70여 년 간 조선시대 최고의 문사 양성기관으로 이름을 떨쳤고, 조광조, 주세붕, 이황, 노수신, 심의겸, 정철, 이이, 유성룡, 이항복, 이덕형 등이 모두 여기를 거쳐 갔으며, 조선왕조 때 명성을 날린 문신들 중 독서당에 뽑혀 수학 연마하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집현전과 홍문관 못지않게 높이 평가됐던 독서당은, 그 명성에 걸맞게 공부하는 당원에 대한 예우가 매우 극진했다. 특히 성종, 중종, 명종 등은 궁중의 음식을 내려주며, 당원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는데, 성종은 수정으로 만든 술잔까지 하사했다. 동호독서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폐지됐으며, 선조 때 다른 곳에 임시로 설치돼 겨우 명맥만 유지되다가, 숙종 이후에는 그마저 시행되지 않았다. 『동호문답(東湖問答)』은 총 11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고금의 치란은 왕패에 있다 하여 왕도를 가장 강조했다. 삼대 이후 왕도를 행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도학에 밝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고, 도를 쌓고 명분을 바로잡을 것을 논했다. 도의 현실 적용문제로서 백성을 평안히 하는 방법과 교육의 방법에 대해서도 논했다. 백성을 평안히 하기 위해서는 폐단이 많은 법을 개혁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언로를 넓히고 중지(衆智)를 모아야 하며, 교화를 펴는 방법은 학교가 으뜸이므로, 태학 및 사학을 이끌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고, 과거제도도 과감히 개혁할 것을 논했다.

이 책은 이이의 경세제민과 사회개혁안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논군도(論君道)ㆍ논신도(論臣道)ㆍ논군신상득지난(論君臣相得之難)ㆍ논동방도학불행(論東方道學不行)ㆍ논아조고도불복(論我朝古道不復)ㆍ논당금지세(論當今之勢)ㆍ논무실위수기지요(論務實爲修己之要)ㆍ논변간위용현지요(論辯姦爲用賢之要)ㆍ논안민지술(論安民之術)ㆍ논교인지술(論敎人之術)ㆍ논정명위치도지본(論正名爲治道之本)’ 등의 11편으로 되어 있다.

‘논군도’에서는 임금이 어떻게 통치해야 할 것인지, 임금의 도리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즉,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호걸들을 제제해 억눌러서 다스린 3왕(三王)ㆍ5제(五帝)와 재주와 지혜는 부족해도 현명한 사람에게 맡겨서 다스린 주나라의 성왕(成王)이나, 은나라의 태갑(太甲), 그리고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어도, 자신의 총명함만 믿고, 여러 신하들을 불신하다 망한 하걸(夏桀)ㆍ은주(殷紂), 재주와 지혜가 부족해 간신들만을 믿고 의지하다가, 혼란하게 된 주나라의 난왕(赧王)이나, 한나라의 원제(元帝) 등의 실례를 들어, 어떻게 통치하는 것이 임금의 바른 도리인가를 명쾌하게 논술하였다.

‘논신도’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나아가 겸선천하(兼善天下; 천하와 더불어 선한 일을 함)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물러나, 독선기신(獨善其身 : 자기 혼자만 선한 일을 함)하는 신하의 도리를 역사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논군신상득지난’에서는 현군(賢君)과 현상(賢相)이 만나기 어려웠던 역사적인 사례를 열거하면서, 도학을 존숭할 것을 논술하였다. ‘논동방도학불행’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도학이 행해지지 못했던 예를 논하였고, ‘논아조고도불복’에서는 당시까지 고도(古道)가 우리나라에서 행해지지 못했던 예를 논하였다.

‘논당금지세’에서는 당시 우리나라의 형세에 대해 논하고, 삼대(三代)의 지치(至治)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술하였다. ‘논무실위수기지요’에서는 무실(務實)해 모든 폐해를 혁신할 것을 논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입지(立志)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논변간위용현지요’에서는 간신과 충신을 가리어, 간신을 멀리하고, 현인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논안민지술’에서는 현신들을 등용하고, 폐법(弊法)을 혁신해, 백성들을 구제하며, 언로를 넓히어, 누구의 말을 막론하고, 좋은 말은 항상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부국을 비롯한 안민의 방법을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며 논하였다.

‘논교인지술’에서는 이미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평화롭게 된 후에 윤리 도덕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면서 그 방법을 논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논정명위치도지본’에서는 당시의 급선무가 안민이며, 안민은 정명(正名)으로써 이룰 수 있다 하여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며, 정명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근본이 됨을 논하였다.

참고문헌

  • 안외순, 「『동호문답』에 나타난 율곡 이이의 초기 정치사상 : 도덕주의와 현실주의의 통일」, 『유교사상연구』 제28집, 한국유교학회, 2007.
  • 장숙필,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 : 유가적 도덕사회를 추구」, 『인문정책포럼』 제3집, 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 2009.
  • 정재훈 역해, 『동호문답: 조선의 군주론, 왕도정치를 말하다』, 아카넷,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