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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김기종(金起宗)이 이괄의 난을 토벌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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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세종 때 이천(李蕆, 1376~1451)이 4군을 개척한 뒤에 그 전말을 기록한 책.
  
 
=='''개설'''==
 
=='''개설'''==
  
이 책은 김기종(金起宗)이 이괄의 난 당시 장만의 도원수(都元帥)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무공을 세운 뒤 토벌기록을 편찬한 것이다. 김기종의 자는 중윤(仲胤)이고, 호는 청하(聽荷)이며, 시호 충정(忠定)이다. 서울 출생으로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자(正字)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 도원수장만(張晩)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 되었다. 영해군(瀛海君)에 봉군(封君) 되었고, 관직이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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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437년(세종 19) 이천(李蕆, 1376~1451)이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있으면서,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 4군을 개척한 뒤에 그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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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은 무관으로 입신했지만, 세종의 두터운 신임 아래 경자자(庚子字) 및 표준저울의 제작과 사륜차의 개발, 군선(軍船)의 개량, 노궁(弩弓) 개발, 악기 개선 등을 이끌었다. 특히 간의(簡儀)ㆍ혼의(渾儀)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 천문기구의 제작을 지휘하여 조선 초기 과학기술 발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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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1432년(세종 14)에서 1437년(세종 19)까지의 여진과의 관계 사실이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군사적인 정벌이나 토벌뿐만 아니라 사민(徙民)ㆍ수세(收稅)ㆍ진휼(賑恤) 등에 관한 현지 실상의 치계(馳啓), 이에 대한 조정의 대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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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초기 여진정책 및 북방정책을 이해하고, 나아가 당시의 국방 및 국제관계사를 이해하는 데에 참고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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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발간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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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현손인 이순(李純)과 관찰사윤금손(尹金孫)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1516년(중종 11) 이순이 서북의 도사(都事) 봉훈랑(奉訓郎)으로 재직하면서, 관찰사윤금손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
  
 
=='''서지 사항'''==
 
=='''서지 사항'''==
  
1책(3l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공신도감자본(功臣都監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3.3cm, 가로 21.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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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2.0cm 가로 20.5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구성/내용'''==
  
『서정록』의 내용은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과정을 적은 것이다. 책에는 난의 고변(告變)으로부터 토평 후의 논공행상에 이르기까지의 전후시말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문회이우등상변적괄(文晦李佑等上變賊适), 이괄난 토평(李适亂 討平), 논공행상(論功行賞), 역모규모(逆謀規模)’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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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이 난의 역사적 배경은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 등의 대북 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과 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이귀(李貴)ㆍ최명길(崔鳴吉)ㆍ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괄 등 서인 세력이 패륜 행위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켰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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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제1차 야인정벌의 정벌군 편성 및 월경작전 양해 교섭 과정과 작전지침 등을 밝혔다. 둘째, 동북방 국경 개척, 포로 송환 분쟁, 동북 군진의 강화와 우도리 대응책 등을 썼다. 셋째, 제2차 야인정벌의 정벌 준비 단계, 서북국경의 방위태세 강화, 정보수집, 김종서의 보복 공격계획 등을 썼다. 넷째, 제2차 야인정벌의 작전계획, 지침하달, 작전 경과 및 사후조치 등을 밝혔다. 그 외에 후기와 부록으로 주요인물과 참고자료 목록이 있다.
  
반정이 성공한 후 김유, 이귀, 김자점 등은 논공행상에서 실질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공을 세운 이괄을 배척하였다. 이에 이괄은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라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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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432년(세종14)부터 국토개척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고려 멸망 이후(1392) 조선 건국 초기 이래 압록강 일대와 함경북도지역을 점거한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였다. 『서정록』은 두만강 유역의 육진(六鎭)과 압록강 유역의 사군(四郡)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여진족의 본거지인 파저강(婆狙江), 즉 현 중국 요녕성(遼寧城) 환인현(桓因縣) 훈강 (渾江) 일대를 1433년과 1437년 2차에 걸쳐 공격 소탕한 작전을 기록하였다.
  
이괄의 군대는 1624년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하였다. 이괄의 군대가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였다. 이괄의 난은 결국 도원수장만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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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록』의 발문(跋文)에서는 1515년(중종10년)에 이순(李純)이 함경도 관찰사윤금손(尹金孫)의 막하에서 근무할 때 집에 소장해있던 책을 소매 속에 넣고 가서, 관찰사에게 ‘이 책은 서북방 야인정벌의 시말과 작전내용 육진 설치등 함경도에 관한 내용이니, 인쇄하여 널리 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고 진언하니, 관찰사가 기꺼이 호응하여,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완성한 것이 지금까지 보존된 『서정록』이라고 하였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 지방에서 97명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23명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군병을 모집하거나, 군량을 수집해 보낸 사람도 39명에 이른다. 고창 출신의 선비 정춘령(鄭春齡)은 안재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고, 무장김춘경(金春景)과 흥덕의 송붕(宋鵬) 등은 어가가 공주에 몽진할 때 왕을 호종하였다. 이외에 고창현에서 안진ㆍ유철견ㆍ조흡ㆍ정춘령, 무장현에서 강시언ㆍ강흔ㆍ김공망ㆍ김덕우ㆍ김여강ㆍ오전ㆍ김경철 등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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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설도 있다. 이순이 집에 소장한 책의 원류는 세종께서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1452년(문종 2)에 의정부 좌의정정인지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와 사관(史官) 58명이 편찬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사초(史草)를 인용함으로서, 실제로 세종실록과 대조한 결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 쓴 것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토벌작전의 주장 중심인물과 관련이 없는 동북방 개척사업 추진실적(함경도의 병마도절제사김종서의 전적)까지 여실하게 필사 수록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실록청 사관 중에 자신의 조상이나 문 중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료의 일부를 복사하여 『서정록』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가문에 비전(秘傳)한 것을 1516년에 목판본으로 처음 간행한 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서정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민심이 동요하고,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을 가서,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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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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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전통적 군사 사상과 용병술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국난 극복에 어떻게 기여해 왔는가를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이 출정군의 작전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치밀하고도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세종을 비롯한 민(民)과 군(軍)이 어떻게 한마음 한 뜻으로 단결하여, 국가적 난국에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는지 알게 한다.
  
이 책은 역모의 규모와 관련자의 색출에 초점을 두어 작성된 자료로서, 이괄의 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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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정록』은 국경 개척과 영토 보호를 위하여 전개한 공세적 방어 작전의 가장 생생한 기록으로서, 장차 있을 수도 있는 이와 유사한 국경 분쟁시 국가 통수 및 군사 지휘기구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귀중한 역사적 사례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이기화, 『고창의 맥』, 고창문화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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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빈, 「조선초기의 여진 관계와 여진인식의 고착화 –태조~세종대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35, 한일관계사연구회, 2010.       
*이영춘, 「인조반정 후에 파견된 책봉주청사의 기록과 외교 활동」, 『조선시대사학보』 59집, 조선시대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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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빈, 「『서정록』의 편저자에 관하여」, 국방부 연구보고서, 1990.       
*한명기, 「17~8세기 한중관계와 인조반정 : 조선후기의 ‘인조반정 변무(辨誣)’ 문제」, 『한국사학보』 제13호, 고려사학회, 2002.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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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판



조선세종 때 이천(李蕆, 1376~1451)이 4군을 개척한 뒤에 그 전말을 기록한 책.

개설

이 책은 1437년(세종 19) 이천(李蕆, 1376~1451)이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있으면서,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 4군을 개척한 뒤에 그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이천은 무관으로 입신했지만, 세종의 두터운 신임 아래 경자자(庚子字) 및 표준저울의 제작과 사륜차의 개발, 군선(軍船)의 개량, 노궁(弩弓) 개발, 악기 개선 등을 이끌었다. 특히 간의(簡儀)ㆍ혼의(渾儀)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 천문기구의 제작을 지휘하여 조선 초기 과학기술 발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내용은 1432년(세종 14)에서 1437년(세종 19)까지의 여진과의 관계 사실이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군사적인 정벌이나 토벌뿐만 아니라 사민(徙民)ㆍ수세(收稅)ㆍ진휼(賑恤) 등에 관한 현지 실상의 치계(馳啓), 이에 대한 조정의 대책 등이 있다.

이 책은 조선 초기 여진정책 및 북방정책을 이해하고, 나아가 당시의 국방 및 국제관계사를 이해하는 데에 참고 자료가 된다.

편찬/발간 경위

이천의 현손인 이순(李純)과 관찰사윤금손(尹金孫)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1516년(중종 11) 이순이 서북의 도사(都事) 봉훈랑(奉訓郎)으로 재직하면서, 관찰사윤금손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2.0cm 가로 20.5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1차 야인정벌의 정벌군 편성 및 월경작전 양해 교섭 과정과 작전지침 등을 밝혔다. 둘째, 동북방 국경 개척, 포로 송환 분쟁, 동북 군진의 강화와 우도리 대응책 등을 썼다. 셋째, 제2차 야인정벌의 정벌 준비 단계, 서북국경의 방위태세 강화, 정보수집, 김종서의 보복 공격계획 등을 썼다. 넷째, 제2차 야인정벌의 작전계획, 지침하달, 작전 경과 및 사후조치 등을 밝혔다. 그 외에 후기와 부록으로 주요인물과 참고자료 목록이 있다.

조선은 1432년(세종14)부터 국토개척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고려 멸망 이후(1392) 조선 건국 초기 이래 압록강 일대와 함경북도지역을 점거한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였다. 『서정록』은 두만강 유역의 육진(六鎭)과 압록강 유역의 사군(四郡)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여진족의 본거지인 파저강(婆狙江), 즉 현 중국 요녕성(遼寧城) 환인현(桓因縣) 훈강 (渾江) 일대를 1433년과 1437년 2차에 걸쳐 공격 소탕한 작전을 기록하였다.

『서정록』의 발문(跋文)에서는 1515년(중종10년)에 이순(李純)이 함경도 관찰사윤금손(尹金孫)의 막하에서 근무할 때 집에 소장해있던 책을 소매 속에 넣고 가서, 관찰사에게 ‘이 책은 서북방 야인정벌의 시말과 작전내용 육진 설치등 함경도에 관한 내용이니, 인쇄하여 널리 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고 진언하니, 관찰사가 기꺼이 호응하여,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완성한 것이 지금까지 보존된 『서정록』이라고 하였다.

다른 학설도 있다. 이순이 집에 소장한 책의 원류는 세종께서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1452년(문종 2)에 의정부 좌의정정인지를 비롯한 당대의 학자와 사관(史官) 58명이 편찬한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의 사초(史草)를 인용함으로서, 실제로 세종실록과 대조한 결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 쓴 것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토벌작전의 주장 중심인물과 관련이 없는 동북방 개척사업 추진실적(함경도의 병마도절제사김종서의 전적)까지 여실하게 필사 수록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실록청 사관 중에 자신의 조상이나 문 중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료의 일부를 복사하여 『서정록』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가문에 비전(秘傳)한 것을 1516년에 목판본으로 처음 간행한 것이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서정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전통적 군사 사상과 용병술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국난 극복에 어떻게 기여해 왔는가를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이 출정군의 작전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치밀하고도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세종을 비롯한 민(民)과 군(軍)이 어떻게 한마음 한 뜻으로 단결하여, 국가적 난국에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는지 알게 한다.

특히 『서정록』은 국경 개척과 영토 보호를 위하여 전개한 공세적 방어 작전의 가장 생생한 기록으로서, 장차 있을 수도 있는 이와 유사한 국경 분쟁시 국가 통수 및 군사 지휘기구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귀중한 역사적 사례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 박정빈, 「조선초기의 여진 관계와 여진인식의 고착화 –태조~세종대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35, 한일관계사연구회, 2010.
  • 임홍빈, 「『서정록』의 편저자에 관하여」, 국방부 연구보고서, 199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