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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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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익재집 |
한글표제 | 익재집 |
한자표제 | 益齋集 |
분야 | 시문집 |
유형 | 한문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이제현 |
간행년일 | 1432 |
권책수 | 8권 2책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익재집(益齋集) |
고려(高麗) 말의 학자 이제현(李齋賢)의 문집(文集).
개설
『익재집(益齋集)』은 고려(高麗) 말의 학자 이제현(李齋賢)의 문집(文集)이다. 원래 고려 때에 간행되었다고 하나,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조에 들어와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역옹패설』의 전ㆍ후집 책머리에는 저자의 자서(自序)가 각각 있다.
구성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 동(同) 습유(拾遺) 1권, 그리고 『역옹패설(櫟翁稗說: 혹은 낙옹비설)』 전집 2권과 후집 2권으로 되어 있다. 책머리에 이색(李穡)ㆍ임상원(任相元)의 서문과 연보(年譜), 뒤에 허경(許熲)의 중간발(重刊跋), 그리고 습유 끝에 류성룡(柳成龍)ㆍ이시발(李時發)ㆍ김빈(金鑌)의 발문이 있다.
특히 저자의 수필(隨筆)ㆍ시화(詩話) 중에는 사서(史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사(遺事)와 기문(奇聞) 및 정치ㆍ사회ㆍ인물 등에 관한 그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편찬/발간 경위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1432년(세종 14)에 왕명에 의하여 원주에서 중간하였다. 다시 1600년(선조 33)에 그의 11대손인 경주부윤이시발(時發)이 간행하였다. 그러나 판목이 낡아 알아볼 수가 없었다. 1693년(숙종 19)에 역시 경주부윤으로 있던 허경(許熲)이 선본(善本)을 구하여 다시 중간하였다. 허경이 중간한 간본에는 연보, 묘지명, 시문의 습유 들이 추가되었다. 1813년(순조 13) 증보ㆍ간행되었다. 1911년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파한집(破閑集)』ㆍ『보한집(補閑集)』ㆍ『아언각비(雅言覺非)』ㆍ『동인시화(東人詩話)』 등과 합본하여 활자본 1책으로 발행한 바 있다.
서지 사항
8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2.9cm, 가로 20.5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제현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검교정승(檢校政丞)이진(李瑱: 1244~1321)의 아들이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서 1등으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5월의 예부시(禮部試)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한관으로 입사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314년(충숙왕 1)에는 충선왕(忠宣王)에게 발탁되어 원(元)에 들어가 왕을 숙위(宿衛)하였다. 이 때 조맹부(趙孟頫)ㆍ주덕윤(朱德潤) 등을 위시한 원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고, 이후 충선왕을 따라, 강남(江南)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그곳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性理學)의 진수를 배우기도 하였다.
충선왕이 토번(土蕃)에 유배(流配)된 후 귀국하여 왕의 사면(赦免)을 위해, 크게 노력하기도 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事)ㆍ첨의평리(僉議評理)ㆍ삼사사(三司使) 등을 역임하면서, 원(元)의 부당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을 무마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후 수상(首相)으로서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反元自主政策)의 추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공민왕(恭愍王)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이 책은 첫머리에 있는, ‘익재집서(益齋集序)’에는 ‘익재집중간서(益齋集重刊序)’와 ‘익재선생난고서(益齋先生亂藁序)’가 실려 있다. ‘익재난고’ 권1 ~ 4까지는 시(詩)가, 권5에는 서(序), 권6에는 서(書), 기(記), 비(碑)가, 권7에는 비명(碑銘), 권8에는 표(表), 권9에는 세가(世家), 사찬(史贊), 서(序), 책문(策文), 논(論), 송(頌), 명(銘), 진찬(眞贊), 잠(箴)이, 권10에는 장단구(長短句)와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이 들어 있다. ‘역옹패설(櫟翁稗說)’은 익재가 환로(宦路)에서 물러나 본제(本第)에 칩거하면서 저술한 것으로, 전(前)ㆍ후집(後集) 각각 2권으로 되어 있다.
전집에는 서(序)ㆍ역사(歷史)ㆍ인물일화(人物逸話)ㆍ골계(滑稽) 등이 실려 있고, 후집에는 서(序)와 시문이 주로 실려 있다. ‘익재집습유’에는 시(詩), 서(書), 서(序), 의(議)가, 부록에는 익재선생연보와 발(跋), 지(識), 간행기(刊行記)가 실려 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 문서에도 뛰어났고, 성리학을 수용,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저자의 문학적 역량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내용은 ‘익재난고(益齋亂藁)’ㆍ‘익재선생문집(益齋先生文集)’, ‘연보(年譜)’, ‘습유(拾遺)’, 그리고 『역옹패설(櫟翁稗說)』의 전ㆍ후집 등으로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문집에 수록된 그의 시문과 사론, 기타 서술은 당시의 문학ㆍ유학, 여(麗)ㆍ원(元) 관계사와 고려 말기 국내외의 정치적 사실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 신호열, 「익재집해제(益齋集解題)」, 『한국의 고전백선』, 동아일보사, 1975.
- 이정호, 「『익재집』의 사료적 가치와 시문 제작시기: 이제현의 정치활동과의 비교 검토」, 『한국사학보』 제52호, 한국사학회, 2013.
- 이춘희, 「익재집해제(益齋集解題)」, 『고려명현집』 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3.
- 장덕순, 「익재집해제」, 『국역익재집』, 민족문화추진회,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