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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 주희(朱熹)가 『논어(論語)』의 장구(章句)와 관련된 이전 학자들과 자신의 주석을 모아 엮은 책.

개설

이 책은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 주희(朱熹)가 『논어』를 사서(四書)의 하나로 추존(推尊)하고, 『논어』의 장구(章句)와 관련된 이전 학자(學者)들과 자신의 주석을 모아 엮은 것이다. 사서는 『논어』ㆍ『맹자』ㆍ『대학』ㆍ『중용』을 말한다. ‘집주(集注)’와 ‘집해(集解)’ 모두 전통적인 경학주석(經學注釋) 방식으로, 주희 이전에 위관(衛瓘)ㆍ손작(孫綽)ㆍ이충(李充) 등의 학자들이 저술한 『논어집주(論語集注)』가 있었다. 이후 주희가 『논어』에 다시 주석을 달면서,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논맹정의(論孟精義)』 등 다수의 시행을 거친 끝에 최종적으로 ‘집주(集注)’ 격식을 완성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논어』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자에 관해서는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ㆍ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현존본은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중의 말을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 『학이편』은 인간의 종신(終身)의 업(業)인 학문과 덕행을, 『요왈편』은 역대 성인의 정치 이상을 주제로 하였다. 이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특히 전반(前半) 10편을 상론(上論), 후반을 하론(下論)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는 문체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지 사항

1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33.2cm 22.5cm이며, 규장각, 삼척시립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논어』는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이다.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고제(高弟)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이 있게 기재되었다. 주희(朱熹)가 『논어』를 『사서(四書)』로 추존(推尊)하고, 이를 통일하여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저술한 후에는 이것이 고주를 대체하였다. 중화민국 초기에는 구문화(舊文化) 개조를 위하여 공교(孔敎)과 『논어』에 대한 비판이 행하여졌다. 그 후에도 비판은 계속되고 있으나, 연구가 지속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도 일찍부터 도래(渡來)되어, 한학(漢學)의 성행으로 널리 보급되고, 국민의 도덕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논어』는 구미(歐美) 각국에도 연구서나 번역서가 많으며, 최근에는 특히 미국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맹자(孟子)』나 『순자(荀子)』 등 옛 문헌에는 공자의 말이 ‘공자왈’, ‘중니왈(仲尼曰)’, ‘전왈(傳曰)’이라고 인용되었으나, 그것이 논어에 기재된 것과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며, 또 논어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기술(記述)도 없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에는 제(齊)나라 학자의 『제론(齊論)』 22편, 노(魯)나라 학자의 『노론(魯論)』 20편이 전해졌고, 따로 공자의 옛집의 벽 속에서 『고론(古論)』 21편이 나왔다. 한(漢)의 장우(張禹)는 제(齊)ㆍ노(魯) 양론을 교합(校合)하여 『장후론(張侯論)』 20편을 만들었고, 이어 후한(後漢)의 정현(鄭玄: 127~200)은 이 세 가지와 고론을 교합하였다. 이 정현본(鄭玄本)을 바탕으로 위(魏)의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라는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함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 근대에 와서 여러 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의 근본을 추구하여, 여러 각도로 『논어』의 문헌을 비판하고, 『논어』 성립까지의 전승계통(傳承系統)을 탐색하였다. 이들은 한(漢)나라까지의 증보(增補)의 경과를 더듬는 등 많은 가설(假說)을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정설(定說)은 수립되지 않았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수사(修辭)의 묘를 얻어, 함축성이 깊다. 또한 문장 간의 연계가 없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해 보면, 공자의 인격으로 귀일(歸一)되어 있다. 공자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구도(求道)의 태도, 관용(寬容) 중에서도 사람을 이상선(理想善)인 ‘인(仁)’으로 이끌고야 마는 교육,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겸허(謙虛)한 안연(顔淵), 직정(直情)의 자로(子路), 현명(賢明)한 자공(子貢), 그 밖의 제자들의 각기 개성에 따른 상호간의 독려 등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도덕설(道德說)을 제시한 공자학단(孔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되었다. 『논어』는 공자가 인생 경험에서 보여준 깊은 영지(英智)의 결정(結晶)으로 음미할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로 이루어져 있다. 유교의 경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논어』는 효경(孝經)과 더불어, 한(漢)나라 이후 지식인들의 필수 서책이 되었는데, 그 해석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고주(古註)라고도 불리는 『논어집해(論語集解)』였다. 송(宋)나라 때에는 유교의 공맹사상(孔孟思想)에 따라 집주를 통일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주희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교와 불교를 비현세적이라고 지적하며, 실제적인 관점에서 유가 사상을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자세에 의한 연구 성과는 원대에 관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사상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러한 경향은 명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왕부지는 생전에 그의 조국인 명나라가 이자성과 장헌충의 농민군에 의해 멸망하고, 농민군은 곧바로 청나라에 멸망당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오랑캐로 여겼던 청나라에게 문화국으로 자부했던 조국이 멸망당하는 현실을 침통하게 목도하며, 그 원인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찾고자 했다. 그는 나라가 멸망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를 등한히 하며 고정적인 불변의 원리주의를 지향하는 제사상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는 과정에 비현실적인 사상으로 여겨지는 온갖 사상에 대해 성리학적 관점으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성리학의 비실제성에 대해 직접 자신의 논리를 동원하여 비판했다. 이것은 그가 성리학적 이론 체계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완전히 긍정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성리학적 이론 체계에 대해 부분적으로 승인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주희 이론 체계 역시 그의 이러한 판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김용재, 「『논어집해(論語集解)』와 『논어집주(論語集註)』의 주석비교(註釋比較)를 통해 본 『논어(論語)』 경문(經文)의 이해(理解)[3] -「팔일(八佾)」을 중심으로-」, 『한문교육연구』 38권, 한국한문교육학회, 2012.
  • 윤인현, 「한국의 성정순화론(性情醇化論)과 풍교론(風敎論)에 끼친 『논어』와 『논어집주』의 영향」, 『어문연구』 34권 2호 통권130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06.
  • 이철승, 「『논어집주』와 『독논어대전설』을 통한 『논어』의 핵심 사상에 대한 주희와 왕부지의 관점 비교」, 성신여자대학교 연구보고서, 2010.
  • 전병욱, 「주자 『논어집주』의 수양론적 해석학 : ‘학(學)’ 개념에 대한 해석에 주목하여」, 『동양철학연구』제59집 , 동양철학연구회, 2009.
  • 주원협ㆍ박미애, 「『논어집주』의 ‘집주’ 격식 및 그 의의」, 『안동학연구』 제12집, 한국국학진흥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