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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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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언해태산집요 |
한글표제 | 언해태산집요 |
한자표제 | 諺解胎産集要 |
분야 | 의학/국어학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宣祖)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허준(許浚) |
간행처 | |
간행년일 | 1608년(선조 41) |
권책수 | 1책 |
사용활자 |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한독의약박물관, 규장각, 영남대학교 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3년 3월 14일 |
1608년(선조 41) 허준(許浚)이 선조(宣祖)의 명을 받아 출산에 관한 증세 및 약방문을 적은 의학서적.
개설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는 당시 어의(御醫)였던 허준이 출산에 관한 증세 및 약방문 등을 정리하여 간행한 산부인과 계통의 의학서적으로, 내의원(內醫院)에서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로 간행하였다. 산부인과 계통의 의학서로는 세종 때의 산서(産書)와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 연산군 때의 『임신최요방(姙娠最要方)』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한문으로 쓰여 있어 부녀자가 보기에는 어려웠다. 이를 개선하고자 선조가 허준에게 명을 하였고, 허준은 1434년(세종 16) 내의(內醫) 노중례가 편찬한 『태산요록(胎産集要)』 2권을 개편한 후 언해한 것이 『언해태산집요』이다.(『성종실록』 3년 3월 14일)
서지 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책 끝에는 간행기가 있고 표지 뒷면에는 내사기(內賜記)가 있으며, 책머리에 선사인(宣賜印)이 찍혀 있다.
원간본은 불분권(不分卷) 1책(81장)의 활자본(훈련도감자, 내의원 목활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물 1088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활자본을 저본으로 한 목판본도 17세기에 간행되었는데,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영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수(卷首)에 「언해태산집요목록(諺解胎産集要目錄)」 5장이 있고, 본문은 모두 76장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체재는 한문이 먼저 실리고 그에 대한 언해문이 한 칸 낮추어 실려 있다.
원간본은 1608년 당시 대사성(大司成)김륵(金玏)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존상태가 불량하며 여러 겹으로 겹쳐 붙어 있다. 한독의약박물관에 보관 중인 목판본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체재와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구성/내용
이 책은 주로 부인과(婦人科)에 속하는 잉태에서부터 출산과 육아·보호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처방과 치료 방법을 부문 별로 수집하여 편찬한 책이다. 『언해태산집요』의 내용은 자식 구하여 낳을 방법부터 시작하여 임신 중의 여러 증세와 약방문, 출산 때에 지켜야 할 일과 금기일 등을 서술하고 있다. 구사(求嗣), 잉태(孕胎), 태맥(胎脈), 험태(驗胎), 변남녀법(辨男女法),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 오조(惡阻), 금기(禁忌), 장리(將理), 통치(通治), 안태(安胎), 욕산후(欲産候), 보산(保産), 반산(半産), 찰색험태생사(察色驗胎生死), 하사태(下死胎), 하포의(下胞衣), 산전제증(産前諸證), 산후제증(産後諸證), 임산예비약물(臨産豫備藥物), 첩산도법(貼産圖法), 부초생소아구급(附初生小兒救急) 등 43개 항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의 증세와 처방이 한문과 언해본으로 나와 있다.
이 책의 여러 처방에 나오는 우리말의 어휘와 표기법 및 한자음 표기 등은 17세기의 국어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고, 다른 시기의 언해 문헌들과의 비교 연구에서 얻는 국어사적 가치도 크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한방(漢方) 수준을 잘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한방의학 사료로서의 가치 또한 적지 않다.
국어사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이라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후의 근대 국어 자료에 비해 후기 중세 국어에 보다 가까운 언어적 특징을 보인다. 예를 들어, ‘ㆁ’자(字)의 경우에 16세기에 이미 ‘ㅇ’과 표기상 혼동을 보이다가 17세기 이후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ㆁ’과 ‘ㅇ’이 종성에서 혼용되는 양상을 보인다.
어두 합용병서의 사용도 후기 중세 국어 문헌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17세기에 어두의 ‘ㅴ’이 ‘ㅲ'이나 ‘ㅺ’과 혼용되다가 차츰 소멸하게 되는데, 이 책은 여전히 정연한 표기 질서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 17세기에 ‘뎌’, ‘디니라’, ‘디니라’처럼 혼동되어 사용되는 것이 여기서는 ‘디여(陷)’로만 나타난다든지, ‘’, ‘’로 혼용되는 것이 여기서는 ‘(時)’로만 나타나는 것 등은 후기 중세국어 문헌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用)’와 ‘쓰다(書)’에서처럼 ‘ㅄ’과 ‘ㅆ’이 혼동되지 않는 것도 동일한 현상이다.
어두음절의 ‘ㆍ’는 18세기 중엽 이후에 ‘ㅏ’로 변화하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ㅡ’로 변화한 예가 나타난다. ‘’과 ‘흙’에서 보이는 동요가 바로 그러한 예로, 1587년(선조 20)에 간행된 『소학언해(小學諺解)』에서 어두음절의 ‘ㆍ’가 처음 동요를 보인 이후 18세기 중엽까지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몇 안 되는 예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어두의 유기음화 현상이 보인다. ‘근 고, 고해 블면’에서와 같이 ‘고(鼻)’가 일반적이지만 ‘산부의 코애 부러’에서와 같이 유기음화된 ‘코’도 나타나고, ‘갈’에 대해서 ‘칼’도 나타난다. ‘긔 지로’에서와 같이 중철 표기가 나타나고, ‘어미과 식이 다 편안고’에서처럼 공동격 조사 ‘와’가 예상되는 자리에 ‘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이는 17세기 자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책의 내용이 처방이나 치료법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수사와 단위 명사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특히 수관형사와 단위명사가 연결된 예가 많이 나타나는데, 그 중 몇 가지 예를 수사의 순서에 따라 들어보면, ‘ 덩이, 두 그르시, 두 술, 두어 , 세 뎜, 네 낫, 서너 환, 다 푼, 여 돈, 다엿 소솜, 닐굽 편으로, 여 애, 아홉 복을, 열 가지, 쉰 환을, 아 환을, 가지’처럼 쓰인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 연구원, 1996.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
- 홍윤표, 『국어사 문헌 자료 연구』, 태학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