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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9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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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농상집요 |
한글표제 | 농상집요 |
한자표제 | 農桑輯要 |
분야 | 농서 |
유형 | 한문 |
지역 | 중국 |
시대 | 원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맹기(孟祺), 창사문(暢師文), 묘호겸(苗好謙) |
간행년일 | 1273(원문), 1537(가정연간본) |
권책수 | 7권 2책(가정연간본) |
소장처 |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농상집요(農桑輯要) |
중국 원(元)나라 때 대사농(大司農)에서 편찬한 농서.
개설
『농상집요(農桑輯要)』는 중국 최초의 관찬(官撰) 농서로, 원나라 조정에서 농업진흥을 위하여 설치한 사농사(司農司)의 창사문(暢師文) 등이 1273년에 집성하여, 1286년에 간행 ·공포하였다. 우리나라에 고려시대 때 처음 들어와, 1372년 무렵에 『목은집(牧隱集)』 권(卷)9로 중간되었으며, 조선 초기 농업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원나라 조정에서 농업 진흥을 위하여 설치한 사농사(司農司)의 창사문(暢師文) 등이 1273년에 집성하여, 1286년에 간행 ·공포하였다. 우리나라에 고려시대 때 처음 들어와, 1372년 무렵에 『목은집(牧隱集)』 권(卷)9로 중간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전 7권) 중에서 권5~7의 부분인데, 권5는 제1~4장까지가 빠져 있고, 권7은 뒷부분 제42판의 뒷부분 이하가 누락되어 있다. 내용은 권5에 과채(瓜菜)와 과실, 권6에는 죽목(竹木)과 약초, 권7에는 자축(孶畜:가축 기르기) 및 관련 세용잡사(歲用雜事)가 실려 있다. 권7 끝에 ‘원조정본농상집요 권제7 하권종(元朝正本農桑輯要卷第七下卷終)’이라 기록되어 있어, 모두 상중하 3책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판식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의 각본(刻本)으로 추정된다. 앞ㆍ뒤가 탈락되어 있으나,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시기의 농업사와 서지학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서지 사항
7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3.5cm, 가로 14.5cm이며,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내용은 경간(耕墾)·파종(播種)·재상(栽桑)·과실 ·약초 등 10문(門)으로 되어 있으며, 『제민요술(齊民要術)』을 비롯한 각종의 문헌을 조리있게 인용하고 있다. 특히 당시의 새로운 유용작물(有用作物)인 목화의 재배를 장려한 기사가 주목된다.
권1에 전훈(典訓)·경간(耕墾), 권2에 파종(播種), 권3에 재상(栽桑), 권4에 양잠(養蠶), 권5에 과채(瓜菜), 권6에 죽목(竹木)·약초(藥草), 권7에 자축, 끝에는 세용잡사(歲用雜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농서가 지니고 있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농서는 원나라의 생산수준과 경제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잠상(蠶桑)과 면화, 그리고 저마(苧麻)의 생산과 장려는 유럽과 아시아 간에 내륙 교통이 열린 뒤 잠사(蠶絲) 수요의 증가에 따른 것이다. 둘째, 농서에 깔려 있는 농본사상(農本思想)은 유목민족인 원나라의 통치가 유목 중시에서 농업중시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농서에서는 재배 작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저마는 동남아시아의 작물이고, 목면은 서역의 작물이지만, 중국 허난성[河南省]과 산시성[陝西省]에서도 본토와 차이 없이 이익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이암(李嵒, 1297∼1364)이 원나라에서 이 책을 수입하였다.
이색이 쓴 『농상집요 후서(農桑輯要後序)』에 보면, “고려의 풍속이 졸박하고 인후하지만, 치생(治生)하는 데에 능하지 못하여, 농사를 짓는 집안은 한결같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물이 불거나 가뭄이 들어도 곧 재해가 되니,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절약하여,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소채(蔬菜)ㆍ건어(乾魚)ㆍ육포(肉脯) 따위에 지나지 아니할 따름이며, 미곡을 중히 여기고, 서직(黍稷)을 경솔히 알며, 삼모시는 많고, 면사는 적으므로, 사람들이 속도 비고 겉도 충실하지 못하여, 바라보면 마치 병들었다 금방 일어난 사람 같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 된다. 초상ㆍ제사에 대해서는 소반(素飯)에 고기를 쓰지 아니하며, 연회에는 소와 말을 잡고, 야생(野生)의 동물로써 만족을 취한다.
집에서 기르는 다섯 마리 닭과 한 마리 돼지는 사람에게 사육(飼育)만 받으며, 아무데도 쓸데없는 것이지만, 차마 죽이려 하지 아니하고, 소와 말은 인력을 대신하여, 큰 공이 있지만, 선뜻 죽이며, 사냥과 놀이의 노고는 혹 사지가 부스러지고, 목숨까지 빼앗기게 되는 수도 있지만 용감히 하며, 우리 속에 기른 가축(家畜)을 잡는 데는 용감하지 못하다. 그 경중을 알지 못하고, 의를 해치고 법제를 무너뜨려, 그 본심을 상실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또 어찌 백성의 죄만이랴. 나는 그윽이 슬퍼하는 바이다. 대개 백성의 재산을 제한하고, 왕도(王道)를 일으키는 것이 나의 뜻인데도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는 데야 어찌하랴.
봉선대부(奉善大夫) 섬주 지사(陝州知事)강시(姜蓍)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농상집요(農桑輯要)』는 행촌(杏村)이시중(李侍中)이 그의 외생(外甥) 판사(判事)우확(禹確)에게 전수하고, 나 강시 또한 우확에게서 얻었는데, 무릇 의식(衣食)과 재정을 충족하게 하는 이유와, 곡식을 심고, 짐승을 기르는 갖가지 준비를 하는 것에 대하여, 각각 부문별로 모아서, 자세히 나누어 분석하고, 촛불로 비치듯이 하였으니, 실로 치생(治生)하는 훌륭한 법이다. 내가 장차 여러 고을에 주고 새겨서 널리 전하게 하려 하는데, 그 글자가 크고 권질이 무거워서 먼 곳에 보내기가 어려울 것을 근심하여, 이미 가는 해서로 써서 등출(謄出)하여 두었고, 안렴(按廉) 김공 주(湊)가 또 베 몇 필로 그 비용을 도와주었다.’하며, 권말에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라고 쓰고 있어, 이 책의 도입 이유를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전해지는 자료들에서 14세기 중엽의 한국 농학자들은 중국에서 『농상집요』를 도입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이를 국내에서 다시 고려판각 『농상집요』를 간행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용도에 맞게, 이 농서를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이를 정리해 보면, 『농상집요』는 첫째, 국내에서 복각되어 활용되었고, 둘째, 초록되어 사용되었으며, 셋째, 권농의 지침서로 참고가 되거나, 넷째,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농서편찬에도 중요한 자료로서 참고 되었다.
이렇게 널리 사용하게 된 까닭은 『농상집요』가 중국에서 국가적으로 편찬된 것과 같이 국내에서도 관에서 다시 판각되거나 요약되고, 행정력을 통해서 『농상집요』의 농업기술이 농촌의 지도층이나 농민에 침투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산가요록』은 『농상집요』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그 편찬 순서에 따라 이를 요약한 조선 초기 농서이다. 그러나 비록 초록하였으나, 그 순서와 요약의 방식은 임의대로 행하였다. 그러나 이 책의 주방(酒方) 이하의 부분은 『농상집요』에 없는 독창적인 부분으로써, 52종의 술 빚기와 각종 식품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관행하였던 여러 식품의 조리법을 정리한 어떤 문헌을 참고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처럼 식품부분을 제외한 『산가요록』의 풀이는 『농상집요』의 내용을 그대로 축소하여 초록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산가요록』의 식품부 속에서 발견되는 ‘동절양채(冬節養菜)’ 조항은 『농상집요』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용으로써, 15세기의 우리 농업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면에서 획기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용섭, 「고려각본 『원조정본농상집요』를 통해서 본 『농상집요』의 찬자와 자료」, 『동방학지』 65,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0.
- 최덕경, 「파종기 농작물에 대한 농민의 생태 인식: 『제민요술』과 『농상집요』를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제73집, 중국사학회, 2011.
- 최덕경, 『농상집요 역주』, 세창출판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