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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8 기준 최신판
| 주요 정보 | |
|---|---|
| 대표표제 | 노릉지 |
| 한글표제 | 노릉지 |
| 한자표제 | 魯陵志 |
| 분야 | 능기 |
| 유형 | 한문 |
| 지역 | 한국 |
| 시대 | 조선 |
| 왕대 | 인조 |
| 집필자 | 성낙수 |
| 저편자 | 윤순거 |
| 간행년일 | 1663 |
| 권책수 | 2권 1책 |
| 사용활자 | 목활자본(木活字本) |
| 소장처 | 규장각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 노릉지(魯陵志) | |
조선인조 때 문인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영월군수로 재직할 때 노릉제(魯陵祭)를 마친 뒤, 저술한 능기(陵記).
개설
『노릉지(魯陵志)』는 조선인조 때에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영월군수(寧越郡守)로 있을 때, 노릉제(魯陵祭)를 마치고, 군아(郡衙)에 소장된 ‘노릉록(魯陵錄)’을 기본으로 저술한 능기(陵記)로 잡기(雜記)와 소설이 곁들여 있다.
편찬/발간 경위
『노릉지』는 ‘단종복위운동’과 관련이 있다. 이 운동의 참여자의 복권 논의는 15세기 후반 이래 제기되었는데, 특히 당시 새롭게 진출하던 사림세력을 중심으로 거론되었다. 사림세력의 주장에 대해 국왕을 비롯한 공신세력의 입장은 신중론 내지는 유보론으로 나타났다. 이런 신중론 내지 유보론은 선왕대 결정된 사안을 번복했을 때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의식한 것이었다.
17세기에는 대체로 사림계 신료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선조대 박계현이라든지, 효종대 조경이나 송준길 등이 이에 해당되며, 『노릉지』의 편찬과정에서 송시열이나 김상헌을 비롯해 박세채 등 당대 대표적 유학자들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이들이 ‘단종복위운동’ 참여자에 대해서, 복권을 거론하는 것은 절의정신(節義精神)의 표방이었다. 반면 국왕이나 국왕의 측근 인사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특히 선조의 경우는 『육신전』에 대해서 소각하려는 의도까지 비추었음은 이를 반영한다.
숙종대 이후 이런 양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논의 자체가 국왕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사육신(死六臣) 복권을 비롯해, 상당수의 복권 조치들이 그러하였다. 이는 군신분의(君臣分義) 확립을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왕권 강화의 논리였다.
그러나 왕실의 입장에서는 조상인 세조(世祖)를 깎아 내리고, 임금 자신의 정통성을 흔드는 논리로 위험시하였다. 오랜 절충과정을 거친 후 숙종대에 이르러, 이 문제는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임금의 독자적 판단과 처분으로 사육신은 복관(復官)되고, 노산군(魯山君)은 단종(端宗)으로 복위된 것이다. 숙종은 사림이 주장해 온 이 문제를 자기 손으로 해결함으로써, ‘군약신강(君弱臣强)’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약화되었던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임금으로서 종래 산림(山林)이 지녔던 세고권(世道權)마저 겸함으로써, 유교정치의 이상적 군주상인 ‘군사(君師)’의 위상을 확립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던 것이다. 수백 년 간 조야(朝野)의 현안(懸案)이었던 사육신 문제의 처리과정에 대한 추적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교훈이라면 바로 이 점, 즉 어떠한 명분(名分)과 대의(大義)를 내세우더라도, 종국적인 문제 해결은 결국 현실적 권력자의 이해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 속성(屬性)이며, 진정한 현실정치가가 역사에서 담당하는 몫이기도 하다. 『노릉지』는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한글본 『노릉지』도 나왔는데, 이는 한문본 『노릉지(魯陵志)』 전체를 번역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부 문장들을 뽑아서, 선택적으로 번역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일부 고유어로 풀어서 번역한 예도 확인된다. 이 책의 말미에 ‘계튝 삼월 초이일 기 다’라는 필사기가 있는데, 편자인 윤순거의 몰년(1668)과 『노릉지(魯陵志)』와 『동사선생문집(童土先生文集)』의 인출 시기(1741)와 이 책에서 나타나는 국어학적 특징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1793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서지 사항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활자본(木活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0cm, 가로 18.5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1에는 단종의 출생부터 사망 후 1698년(숙종 24) 복위될 때까지의 사실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고, 다음으로 분묘(墳墓)의 관리, 남효온(南孝溫)의 단종 복호상소(復號上疏), 사묘(祠墓)ㆍ제축(祭祝)의 사실 등을 실었다. 권2에는 노릉을 소재로 한 시문(詩文)을 수록하고, 그 뒤에 부록으로 황보 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ㆍ허후(許詡)ㆍ사육신(死六臣)ㆍ정보(鄭保)ㆍ금성대군(錦城大君)유(瑜)ㆍ생육신(生六臣) 등의 전기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관한 기록을 실었다.
참고문헌
- 김 돈, 『조선전기 군신권력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노상복, 「노릉지」, 『정신문화연구』 제17권 제4호(통권 57호), 한국학중앙연구원, 1994.
- 이근호, 「16~18세기 '단종복위운동' 참여자의 복권 과정 연구」, 『사학연구』 제83호, 한국사학회, 2006.
- 정만조, 「숙종조의 사육신 추숭과 서원제향」, 『한국학논총』 33권,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