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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8 기준 최신판



남송(南宋) 대에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희(朱熹) 및 유자징(劉子澄) 등이 만든 유학서.

개설

『소학(小學)』은 중국 남송 시대에 주희의 감수 아래 그의 제자인 유자징 등이 편찬한 책으로, 『소학서(小學書)』라고도 한다. 1185년에 대략 탈고하고, 그 뒤 일부 수정을 가하여, 1187년 주희가 58세 때 완성했다. ‘소학’이란 ‘대학(大學)’에 대응시킨 말이며, 아동의 초보교육을 위해 일상적인 예의 범절과 어른을 섬기고 벗과 사귀는 도리 등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내용은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6권이다.

한국·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많이 읽혔으며, 주석서도 여러 가지로 만들어졌는데, 그 가운데 명(明)나라의 진선(陳選)이 지은 『소학집주(小學集註)』가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에서 『소학』은 유교의 도덕적·실천적인 학(學)의 내용을 강조하는 수신서로 작용하였으며, 성리학에 뜻을 둔 유생뿐 아니라 민간에게까지 읽혀지면서 충효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윤리관을 진작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한국에서 『소학』이 중요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어릴 때부터 유교적 윤리관을 체득하게 하기 위해 아동의 수신서(修身書)로 장려되며 사학(四學)·향교·서원·서당 등 그 무렵의 모든 유학 교육기관에서 『소학』을 필수과목으로 다루었다.(『세종실록』 21년 9월 29일) 조선 초기 기록인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사부학당에서 『소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조선에서 간행된 『소학』은 음훈주해(音訓註解)가 미비하니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에게 『집성소학(集成小學)』 100권을 구해 올 것을 예부가 요청하는 것을 볼 수 있다.(『세종실록』 7년 12월 23일) 그리고 1428년(세종 10)에는 『소학』은 배우는 이들의 기본이기 때문에 주자소(鑄字所)에서 이를 인쇄·간행할 필요가 있다는 허조(許稠)의 주장에 따라 『소학』을 간행하였다.(『세종실록』 10년 9월 8일) 1436년(세종 18)에는 사부학당의 생도들이 『소학』을 어린이가 배우는 학문으로 여겨 평소에는 잘 읽지 않다가 성균관에 진학할 자격을 주는 승보시(陞補試)가 있을 때만 임시로 읽는다는 폐단이 지적되기도 하는 등 『소학』은 조선 초기부터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세종실록』 18년 윤6월 25일)

세종 대에 『소학』이 강조된 것은 국가가 수성기로 진입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민풍’과 ‘사풍’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이에 『소학』을 통한 교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학문과 수기를 통해 정치의 장에서 신하들보다 우위를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사표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소학』을 보급했다. 세종 대 소학의 보급에는 군주와 신하로 이루어진 권력 관계 속에서 군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고 정치를 주도해 나가기 위하여 『소학』을 활용하였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소학』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여러 학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는데, 권근(權近)은 『소학』의 통달을 강조하면서 먼저 『소학』을 읽은 다음에 다른 공부를 할 것이며, 성균관에 입학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소학』의 능통 여부를 알아본 다음에 시험에 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은 『소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모든 학문의 입문이며 기초인 동시에 인간교육의 절대적인 원리가 됨을 역설하였다. 그 자신이 일생 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고 한다. 이들 이후로도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이황(李滉) 등 도학실천(道學實踐)을 중요시한 선비들이 『소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사림파(士林派)들이 민중교화의 수단으로 이를 권장하였으며, 김안국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재임할 때 『소학』을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발간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바탕이 되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소학』의 편찬 및 발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소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고종(高宗) 때 박재형(朴在馨)은 『소학』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고 거기에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도학·가언·선행 및 충신·효자·열부의 고사를 첨가하여, 『해동소학(海東小學)』을 편집·간행하기도 하였다.

서지 사항

총 6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 중인 것은 1756년(영조 32)에 간행된 것으로, 책의 크기는 세로 27.8cm, 가로 18.0cm이다.

구성/내용

『소학』은 6권의 구성은 「내편」과 「외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편」은 경서를 인용한 개론에 해당하고, 「외편」은 그 실제를 사람들의 언행으로 보여 주고 있다. 보다 자세히 내용을 살펴보면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를 주요 내용으로 하여, 유교의 윤리사상을 강론한다. 입교는 교육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고, 명륜은 오륜을 밝힌 것이며, 경신은 몸을 공경히 닦는 것이고, 계고는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입교·명륜·경신을 설명한 것으로, 「서경(書經)」·「의례(儀禮)」·「주례(周禮)」·「예기(禮記)」·「효경(孝經)」·「좌전(佐傳)」·「논어(論語)」·「맹자(孟子)」·「제자직(弟子職)」·「전국책(戰國策)」·「설원(說苑)」 등의 문헌에서 인용하여 편집하였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데, 가언은 옛 성현들의 좋은 교훈을 인용하고, 선행은 선인들의 착한 행실을 모아 입교·명륜·경신을 널리 인용하고 있다. 즉,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進退) 등 어린아이의 처신하는 절차부터 인간의 기본 도리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는 것으로, 주로 송(宋)나라 제유(諸儒)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소학』은 전편을 통하여 유교의 효(孝)와 경(敬)을 중심으로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과 수기(修己)·치인(治人)의 군자를 기르기 위한 계몽(啓蒙) 교훈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겠다.

또한 이 책은 유교사회에서 필수적인 도덕규범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의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조선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소학』을 읽은 후에 다른 책을 접할 것을 강조하여, 양반의 자제들은 소학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학문을 시작하였다.

한편 이 책에 대한 주석서는 주로 명·청 시대에 나왔는데, 명나라 진선이 작성한 『소학집주』 6권과 『소학구두(小學句讀)』를 비롯하여, 정유(程愈)가 만든 『소학집설(小學集說)』, 청나라 고유(高誘)의 『소학찬주(小學纂注)』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 사대부의 자제들은 8세가 되면 유학의 초보로 이를 배웠다.

의의와 평가

『소학』은 유교의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배움의 내용을 강조하는 수신서로서, 성리학에 뜻을 둔 유생뿐만 아니라 민간에까지 널리 읽혔다. 이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충효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관을 널리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권윤정, 「『소학』의 세계-유교문화와 도덕교육」, 『도덕교육연구』21-2, 한국도덕교육학회, 2010.
  • 권윤정ㆍ구리나, 「『소학』에 나타난 도덕교육원리」, 『도덕교육연구』24-2, 한국도덕교육학회, 2012.
  • 박홍규ㆍ송재혁, 「세종과 『소학』-민풍(民風)과 사풍(士風)의 교화」, 『대한정치학회보』20, 서울:대한정치학회, 2012.
  • 이상호, 「영남학파의 『소학』 중시가 가진 철학적 특징과 교육적 함의」, 『국학연구』1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1.
  • 진원, 『소학 사람의 품격을 높이는 지침서』, 교보문고,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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