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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8 기준 최신판



조선 중기의 학자 이황(李滉)이 명종 8년(1553)에 『주자전서(朱子全書)』에 실려 있는 주자의 편지글 가운데서 뽑아 엮은 책.

개설

『주서절요(朱書節要)』는 퇴계이황(李滉)이 명종 8년(1553)에 『주자전서(朱子全書)』에 실려 있는 주자의 편지글 가운데서 뽑아 엮은 책이다.

이황은 많은 유학자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를 숭배하였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서문에서 “회암(晦菴) 주선생은 공자에 버금가는 자질을 타고 나셔서,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였으니, 도와 덕은 아득히 높고, 그 남기신 사업과 공덕은 광범하고, 위대한 것이었다. 경전의 뜻을 밝혀서 후세에 남기셨으니, 이는 귀신들에게 물어 본다 할지라도, 의심할 바가 없고, 백세 이후에 새로이 태어나는 성인이 본다 할지라도 의혹될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기고봉(奇高峰)에게 준 편지에서도 “주자는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고, 또한 천하의 모든 사람과 고금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스승으로 높이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주자는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한ㆍ당대의 유학까지도 집대성한 학자이다. 그러므로 이황의 주자에 대한 숭배는 철저했다.

이황이 주자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40세가 넘어서인 듯하다. 『주자서절요』 서문에 의하면 중종 38년에 왕명으로 『주자대전』이 간행됨으로써 처음으로 『주자대전』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자대전』이란 주자사상을 총집성한 주자전집을 말함이다. 이 때 이황의 나이 43세였다. 그 때까지는 『주자대전』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고, 이황 자신도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고, 또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책이 새로 간행됨에 이를 구하여, 병으로 관직을 쉬게 되었을 때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이 책을 읽게 되자, 비로소 이 책에 대해서 무한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서지 사항

1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1.5, 가로 20.5cm이며, 한국국학진흥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황은 주자의 학설을 옹호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주자의 사상을 전파ㆍ보급하고, 그 학맥이 면면히 이어가기를 희망하고, 또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작업이 곧 『주서절요(朱書節要)』와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의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서’는 『주자대전』 가운데 실려 있는 주자의 편지를 말한다. 『주자대전』 총 100권 가운데 편지글은 제24권부터 제64권까지 해당하며,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 학자들은 편지를 통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생활을 교환하기도 했지만, 한편 학문과 사상에 관한 질의ㆍ응답 등을 주로 편지를 통하여 교환하였다. 주자의 편지글이 많은 것은 제자들과의 학문적인 교류가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이다. 이 많은 편지글을 사람마다 모두 읽고, 그 사상내용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황은 편지글 가운데 주자의 사상이 잘 표현된 것, 또 후세 사람으로서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편지들만 골라 뽑아서, 14권 7책으로 만들어 이를 『주서절요(朱書節要)』라고 하였다. ‘절요’란 중요한 것을 골랐다는 뜻이다. 이황이 이와 같이 『주서절요』를 편찬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주자학으로 인도하려는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주자학의 진작이기도 하였다.

이황이 주자학의 올바른 전승의 맥을 밝히려고 편술한 책이 곧 『송계원명이학통록』이다. 이황은 『주자대전』, 『주자어류』 등 자료를 이용하여, 주자와 더불어 학문적인 관련이 있었던 제자와 후대 즉 원(元), 명(明)대의 주자학자들을 총망라하여, 이를 조사하여 그들의 이력과 학문, 사상을 정리하여 이를 『송계원명이학통록』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실린 사람의 수는 총 516명이다.

주자를 가장 잘 알았던 이황은 그만큼 주자를 철저하게 신봉하였다. 이황은 주자의 학문적인 이론만을 신봉하고 따랐던 것이 아니라, 주자의 행동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본받으려고 하였다. 학봉김성일의 기록에도 보이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거절하고 받아들이는 것,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 등을 그대로 본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맹목적 흉내가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모두 의리에 맞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학은 본래 지식만을 추구하는 주지주의 일변도의 학문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합치하기를 바라는 학문이다. 이것을 도학(道學)이라고 하는데, 이황은 주자를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할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황은 주자의 학문을 스스로 실천하는 한편 주자의 학문을 철저하게 옹호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곧 진리를 지키는 일이요, 진리를 밝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황은 주자학적 이론과 반대되는 많은 학설을 비판하였다. 중국학자로는 주자학을 반대한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비판하였고, 주자학자이면서 주기(主氣)로 흐른 나정암(羅整菴)을 비판하였고, 또 우리나라 학자로는 주기(主氣)의 입장에 선 화담(花潭)서경덕과 그의 제자 이연방(李蓮坊)을 비판하였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주석을 통하여, 선학(禪學)에 물든 노소재(盧蘇齋)를 비판하였다. 또 사칠이기논변(四七理氣論辯)을 통하여, 이와 기를 하나로만 보는 기고봉(奇高峰)의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주자의 올바른 이기관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참고문헌

  • 도산서원, 『도산서원지』, 도산서원, 1980.
  • 박종배, 「조선시대 학교의례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 송희준, 「「주자서절요」와 「주서백선」의 비교 연구」, 『퇴계학논집』 15권, 영남퇴계학연구원, 2014.
  • 신병주, 「16세기 처사형 사림의 대두와 학풍」, 『규장각』 제21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