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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7 기준 최신판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인 권근(權近)의 『예기』 주석서.

개설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1405년(조선태종 5) 간행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양촌(陽村)권근(權近)의 저서다.

권근은 본래 『예기(禮記)』의 편차에 착란(錯亂)이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경정(更正)할 계획이었으나, 저서의 체제상 불편한 점이 있어, 진호의 『예기집설(禮記集說)』의 편차를 그대로 살리고, 단절말미(段節末尾)에 ‘안어(按語)’를 달아, 자기의 견해를 피력(披瀝)하는 방법을 취했다. 다만 각 편 단절의 간차(簡次)는 ‘구재(舊在)’라 하여, 교주(校註)를 달았고, 이것은 모든 책에 걸쳐 많이 행해졌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내용을 경(經)과 전(傳)으로 구분한 것으로 ‘곡례(曲禮)’ㆍ‘예운(禮運)’ㆍ‘악기(樂記)’ 등이다. 둘째, 『예기』의 원형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단궁(檀弓)’ㆍ‘월령(月令)’ㆍ‘상대기(喪大記)’ 등이다. 셋째, ‘예기’의 원형을 따르되, 분절(分節)을 시도한 것으로 ‘증자문(曾子問)’ㆍ‘문왕세자(文王世子)’ 등이다. 넷째, 후세의 저작으로 보는 것으로 ‘왕제(王制)’ㆍ‘명당위(明堂位)’ㆍ‘대전(大傳)’ 등이다. 권근의 ‘안어(按語)’는 거의 모든 절에 가해져 있다. ‘안어’ 중에는 간차(簡次)를 경정한 것에 관한 설명도 있다. 또 전후(前後) 문의상(文義上)의 연락(連絡)을 잡기 어려운 구절에 대해서도 ‘안어’에 언급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권근은 원래 저자의 스승인 이색(李穡)이 『예기』의 간편(簡編)을 다시 편찬하면서, 글의 뜻을 변론하려 하였으나, 노환으로 마치지 못한 것을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저술을 마쳤다. 그 뒤 저자는 성균관에서 몇 해 동안 『예기』를 강론하면서 얻은 견해를 첨삭(添削)해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1405년(태종 5)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되었다. 또 1418년(태종 18) 저자의 아들 도(蹈)가 제주안무사(濟州按撫使)이간(李暕)에게 위촉하여 중간(重刊)하였으나, 그 후 판각(板刻)이 불에 타 책을 얻기 어렵게 되어, 1705년(숙종 31)에 제주목사(濟州牧使)송정규(宋廷奎)가 다시 중간하였다.

서지 사항

36권 11책으로 구성되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1.0cm, 가로 19.4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 우리나라 최초의 유교 경전 주석서인 권근의 『오경천견록』의 하나이다.

제1책은 예기천견록목록, 곡례(曲禮) 상ㆍ하, 제2책은 단궁(檀弓) 상ㆍ하, 제3책은 왕제ㆍ월령(月令), 제4책은 증자문(曾子問)ㆍ예운(禮運), 제5책은 예기(禮器)ㆍ교특생(郊特牲)ㆍ내칙(內則), 제6책은 옥조(玉藻)ㆍ상복소기(喪服小記), 제7책은 소의(少儀), 악기(樂記) 상ㆍ하, 제8책은 잡기(雜記) 상ㆍ하, 상대기(喪大記), 제9책은 제법(祭法)ㆍ제통(祭統), 제10책은 중니연거(仲尼燕居)ㆍ표기(表記), 제11책은 분상(奔喪)ㆍ투호(投壺)ㆍ사의(射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기』는 대성(戴聖)이 지은 ‘소대례기(小戴禮記)’ 49편으로 본래 잘못 배열된 곳이 많아, 권근은 이를 바로잡아 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저서의 체제상 불편한 점이 많아 진호의 『예기집설』의 편찬 목차를 그대로 따르면서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자기의 생각, 즉 ‘안어(按語)’을 달아 놓았다.

고려 말에 성리학의 도입과 더불어, 『주자가례(朱子家禮)』는 당시 신진 사대부들에 의하여 주자학의 중요한 한 갈래를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 벌써 『주자가례』를 실천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미 조선 예학의 단초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권근은 여망선초(麗末鮮初)라는 사회ㆍ정치적 격변의 시대상황 속에서 성리학적 이해에 바탕을 두고, 독특한 예학사상(禮學思想)을 구축하여, 예제사회(禮制社會) 건설의 기초를 다졌으며, 또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통하여, 예(禮)의 본질을 규명하고, 예제사회 구현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의 이런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권근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당연지사로 이해하고, 효가 효서 제대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경(敬)이라는 예의 근본정신이 기저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는 제사를 『예기(禮記)』의 내용을 분명히 인식하여 지내야 하고, 조상신과의 교감 여부는 제례를 행하는 주체의 효심에 있다고 하여, 효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둘째, 양촌은 기본적으로 적장자(嫡長子) 승계의 원칙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양촌의 주군이었던 태종은 정란을 통하여 형제를 도륙하면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전력이 있기 때문에 대의명분과 정통성 차원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양촌은 종법(宗法)에 관해 고민한 것이다. ‘찰법(察法)’에서 순(舜)과 우(禹)가 교(喬)와 체(禘)에서 조상신에 대한 제를 올리면서, 혈연과 정치적 정통 가운데 어느 편을 중시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에서 양촌의 이러한 고민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제례는 원칙적으로 예문의 절차에 따라 상례(常禮)를 준수해야 하는 것이지만, 원래의 취지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현실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제례(祭禮)의 변통(變通)에 주목하는데, ‘증자문(曾子問)’편에서 종자(宗子)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사를 받들지 못할 경우 섭주(攝主)가 제례를 대행한다. 진호(陳澔)가 이 부분의 예문(禮文)을 기록자의 오류라고 추정하는 반면, 권근은 섭주가 종자를 대신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도 일면 합당한 측면이 있으므로, 제례의 절차를 거꾸로 펼쳐 정례와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하여, 행례(行禮)의 탄력적 적용을 강조한다.

넷째, 양촌은 제례의 다음과 같은 기능에 주목한다. 제례는 보본반시(報本反始)라는 일차적 목적 이외에 자가 동질성을 확인하고 가족 구성원간의 협동심을 배양하며, 효경을 배양하고, 실천하는 학습의 장이며, 나아가 제례는 집단 구성원 상호간의 불신이나 마찰, 혹은 갈등을 해소하고, 나아가 서로를 존중하는 교화의 장이라는 것이다.

권근은 『양촌집(陽村集)』,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하였다. 그 중 『오경천견록』은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만이 알려졌으나, 잇달아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의 천견록이 발견되었다. 『춘추천견록(春秋淺見錄)』만 발견되면, 한 질이 모두 갖추어지는 셈이다.

참고문헌

  • 강문식, 「『예기천견록』의 편찬 경위와 권근의 예론」, 『규장각』 제25집,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2.
  • 권근, 『오경천견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 김석제, 「양촌의 제례의식에 관한 일고: 『예기천견록』을 중심으로」, 『유교사상연구』 제16집, 한국유교학회, 2002.
  • 이봉규, 「권근(權近)의 경전 이해와 후대의 반향」, 『한국실학연구』 13권, 한국실학학회, 2007.
  • 이봉규, 「조선시대 『예기』 연구의 한 특색」, 『한국문화』 47권,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9.
  • 이창교, 『예기천견록: 고서해제』, 국회도서관 연구보고서, 1968.
  • 허종은, 「양촌 권근의 예론에 관한 연구: 『예기천견록』을 중심으로」, 『한국철학논집』 제3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