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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1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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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의정 |
한글표제 | 원의정 |
한자표제 | 源義政 |
동의어 | 족리의성(足利義成), 족리의정(足利義政) |
관련어 | 대장경(大藏經), 응인(應仁)의난,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집필자 | 윤성익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의성(義成) |
성별 | 남 |
생년/일 | 1436년 1월 20일 |
몰년/일 | 1490년 1월 27일 |
출신지 | 일본 |
관력 |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족리의교(足利義教), 모: 일야중자(日野重子) 처(정실): 일야부자(日野富子), 형제: 의승(義勝), 정지(政知), 의시(義視)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의정(源義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0년 4월 27일, 『세종실록』 30년 6월 21일, 『세조실록』 2년 3월 15일, 『성종실록』 22년 9월 5일 |
일본 실정막부 8대 장군.
개설
족리의정(足利義政)이다. 실정막부의 장군인 족리씨는 조선과 통교 시에는 본성인 원(源)을 사용하였다. 의정은 실정막부 6대 장군 족리의교(足利義敎)의 3남으로 7대 장군 족리의승(足利義勝)의 동생이다. 초명은 의성(義成)이다. 의교가 1441년 가길의 난으로 암살된 뒤 1442년 11월 적남인 의승이 9세의 나이로 장군에 올랐는데, 의승도 불과 재임 8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이에 관령(管領) 전산지국(畠山持國) 등의 후원을 얻어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여덟 살로 연소하여 1449년 정식으로 장군직에 올랐다. 1453년 의정(義政)으로 개명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의정은 여덟 살에 족리씨의 가독이 되었지만 막부의 실권은 관령 전산지국 등 유력 영주들에게 있었다. 가길의 난과 이후 ‘어린 장군’들의 재임 하에서 유력 영주들 간의 합의 체제가 기본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의정이 장군에 오른 뒤 초기에는 장군 권력의 강화에 뜻을 두고 조부인 족리의만(足利義滿)이나 부친인 의교의 정책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심화로 막부 지배 체제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하였다. 중앙에서는 장군가 내부의 분란이나 유력 영주들의 정치 개입으로 장군인 의정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지방에서는 막부 권력을 지탱하는 유력 영주 집안의 가독 상속을 둘러싼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내분은 관령가인 전산씨(畠山氏)·사파씨(斯波氏)에게도 미쳐 후에는 전국적인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각지에서는 민중들의 봉기가 빈발하였고 1459년 이후에는 관정(寛正)의 대기근으로 기아와 역병이 만연하였다. 이런 총체적 위기상황이었음에도 의정은 정치에 관심을 잃은 채 유희에 빠지고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종 수탈도 강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막부내부의 권력투쟁으로까지 발생하였다. 1464년 의정은 동생인 의시(義視)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는데 1465년 정실인 일야부자(日野富子)가 아들을 낳아 의시와 부자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이 갈등에 유력 영주인 세천씨(細川氏)·산명씨(山名氏)가 가세하고 사파씨·전산씨의 내분 문제가 겹쳐 막부 중앙의 문제만이 아닌 전국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응인(應仁)의 난이었다.
이런 전란 중에 의정은 1473년 장군직을 아들인 의상(義尚)에게 물려주고 은거, 풍류 생활에 들어갔다. 경도(京都)의 동산(東山)에 거처를 두고 살면서 문화예술 방면에 힘을 썼다. 무가·공가·선종 등의 문화양식이 융합되어 탄생된 이 시기의 문화양식을 동산문화라고 하였다.
활동 사항
의정은 정식으로 장군에 오르기 전인 1448년(세종 30) ‘일본국왕 원의성(源義成)’ 명의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은 의교의 사망 이후 명과의 통교가 다시 중단되었는데 이때 일본의 사신은 대장경을 요청하면서 명과의 통교 재개를 위한 중재를 조선 측에 요청하였다(『세종실록』 30년 4월 27일). 명과 일본의 감합무역은 그 뒤 1451년 재개되었다.
조선에 보내온 서계에서 ‘일본국왕 원의성’이라고 한 것은 1448년(『세종실록』 30년 6월 21일)뿐이고 그 이후에는 ‘일본국 원의성’이라고 하고 있다. ‘원의정(源義政)’ 명의의 사신은 1456년(세조 2)부터인데(『세조실록』 2년 3월 15일) 주의할 것은 의상(義尚)에게 장군직을 넘겨준 1473년(성종 4) 이후에도 ‘원의정’ 명의로 사신이 파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성종실록』에서는 의정이 죽고 그 뒤를 의재(源義材)가 이었다는 예조에서의 주문이 있는데(『성종실록』 22년 9월 5일), 이에 대하여 호조 판서이극돈(李克墩) 등은 원의정이 원의상에게 전위하였고 원의상이 후사 없이 죽어 원의재가 자리를 이었다고 정정하고 있다[『성조실록』 22년 9월 5일 6번째기사].
실정막부의 역대 장군 중 의성 명의 등 일본국왕사를 가장 많이 파견한 것이 의정이었다. 일본국왕사는 대장경이나 사찰건설 비용과 같은 경제적인 요구 외에 명과의 통교 중재 등도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일본으로부터의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 문제가 표면화되었던 때였다. 1470년(성종 1)·1475년(성종 6) 경우는 위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 외 일본국왕사의 경우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서는 의성과 의정을 부자 관계로 오해하고 있다.
참고문헌
- 橋本 雄, 『中世日本の國際關係―東アジア通交圈と僞使問題』, 吉川弘文館,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田端泰子, 『足利義政と日野富子―夫婦で担った室町將軍家』, 山川出版社, 2011.
- 민덕기, 「실정막부(室町幕府)의 대명조공(對明朝貢) 중재요청과 조선의 대응」, 『일본역사연구』 1, 일본사연구회, 1995.
- 신동규, 「<조선왕조실록> 속의 일본국왕사와 위사」, 『왜구 위사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국왕사의 조선통교」, 『한일관계사연구』 21, 한일관계사학회, 2004.
- 百瀬今朝雄, 「應仁·文明の亂」, 『岩波講座 日本歴史』 7, 岩波書店, 1976.
- 石田晴男, 『應仁·文明の亂』(戰爭の日本史 9), 吉川弘文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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